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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로마서 6장 강해 죄에서 자유한 생활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40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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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강해 일부. 죄에서 자유한 생활
로마서 6장 1-로마서 6장 11절
요절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5장까지는 죄악론과 구원론을 배웠습니다.  3-5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의로워지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배웠습니다.

로마서 6장부터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화의 과정인 성화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시체들이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정욕의 죄를 짓기도 하고 도적질도 하고 싸움질도 합니다. 이것은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죄를 짓는 사람들은 이런 웃지 못 할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1)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온 것은 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깊이 발견하면 죄사함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므로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를 더 많이 짓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의 아들은 자신이 목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저주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죄를 짓고 와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인데 자신은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 죄를 많이 짓지 않아서 죄사함의 은혜가 적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말이 되는 것 같으나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죄를 많이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많이 발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면 크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출신으로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욱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죄를 깨달으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기절한 자는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어서 무덤 속에 묻힌 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서 강시처럼 다니며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리는 목을 잘라도 잠시 걷지만 금세 죽습니다. 우리는 오리처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들입니다. 잠시 죄악된 옛사람이 살아있지만 결국은 생명을 잃고 힘을 못 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서 옛사람과 완전히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3,4)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을 알 때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옛사람이 언제 죽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침례받을 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침례받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 우리도 함께 장사 지냈습니다. 우리가 물속에서 침례받을 때 우리의 옛사람도 장사 지낸 것입니다. 

우리가 물에서 나올 때 우리의 새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 지냈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장발장을 쓴 빅토리 위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위고는 매우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결혼하고 아내와 딸이 있는데 다른 여자와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후 사랑하는 외동딸이 결혼 후에 얼마 안 되어 신랑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위고는 딸의 죽음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딸은 내가 죽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딸이 죽었다.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위고는 변화되기 위해서 피나는 투쟁을 하였습니다. 거의 이십 년이 되어 그는 그 유명한 장발장을 썼다고 합니다. 그는 장발장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아는 자들이 변화되고자 하는 투쟁을 쓴 것이 장발장의 주제입니다. 장발장은 딸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일치시키며 투쟁하였습니다.
저는 한 사람과 갈등이 극에 달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여 십자가의 예수님 소감을 썼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채찍질하고 침 뱉고 발길질하는 군병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한 사람을 구박하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구박하는 자였습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자였습니다. 그 후에 그 사람과의 큰 갈등은 끝이 났습니다. 그 사람을 구박하고 미워하던 옛날의 내가 예수님을 죽게 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갈등이 있었지만 점차 옛날의 나는 죽었고 새롭게 나는 태어났으므로 갈등이 약화되었습니다.
우리도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나의 죄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죽인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때 나도 예수님과 같이 죽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다시 죄악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새 생명을 주신 예수님)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4b-5)

우리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옛날의 자아는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를 짓는 죄의 몸은 멸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면 이제 우리는 사라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같이 우리의 새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은 새 생명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의 육신은 예수님 믿기 전이나 후나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죄사함을 얻을 때 우리 안에 성령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이 바로 새 생명입니다. 이 성령님은 부활하여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이 분이 들어와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의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보고 사도바울은 새 생명을 얻었다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새 생명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거듭난 새 생명을 아주 분명하게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장20) 이 말씀은 선명하게 새 생명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생명은 내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자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서 소원을 두고 일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장 13)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자신의 기쁘신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계시고 소원을 두시고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의 소원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 성령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권세자이십니다. 죄보다 권세가 있고 사망보다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죄와 사망 권세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는 슬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허무해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인식)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

우리는 먼저 내가 죽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옛사람이 죽은 것을 안다고 합니다. 

3절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 이제 죄의 몸이 힘을 잃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따라 사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죄와 관계가 끊어집니다. 죽은 자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는 죄에서 벗어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죄에서 자유함을 받는 것은 죽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믿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8,9)

우리가 알았으면 믿는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옛사람이 죽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것을 믿었으면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해서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을 지속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살아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살아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셨으므로 그리스도는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사망이 다시는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에서 자유를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은 우리도 이제 사망권세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살면 다시는 사망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었지만 우리가 옛날의 육체도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죽었지만 죄악된 육체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거듭난 우리는 옛 생명과 새 생명을 가진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 오랫동안 죄악된 생활을 했습니다. 죄를 짓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받고 거듭났을지라도 우리가 곧바로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430년 바로의 압제에서 출애굽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들이 바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후에야 바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우리가 온전히 죄에서 자유를 얻고 새 사람이 되는 데는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김)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10,11)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시고 단번에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단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매일 매번 반복하여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기고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은 믿는 것을 여긴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는 이 일은 우리가 매번, 순간 순간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했습니다. 술과 여자와 노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새 생명을 얻은 후에 예전에 다니던 술집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전에 함께 술 마시던 여자들이 붙잡았습니다. “잠깐 쉬었다 가세요.”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누가 어거스틴이란 말인가? 그 사람 죽었어.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 딴 사람이야.” 그러자 여자들은 다시 말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다 아는데 그때 그 사람 분명히 맞잖아요. 여기 목 뒤에 점 있는 것도 알고 있는데.” 어거스틴은 고개를 저으며 분명히 말합니다. “아니야,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본 것 아닌가? 그 사람은 죽었고 장례도 치렀단 말이야. 나는 다른 사람이야.” 그러자 여자들이 더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은 죄가 자신을 붙잡을 때마다 그렇게 죽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악이 우리를 떠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긴다는 것은 계산하다. 그렇게 간주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죄에게 계산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죽은 몸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깡패 김익두가 있습니다. 그분은 유명한 깡패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깡패 김익두는 죽었다”고 부고장을 만들어 아는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아줌마가 시험을 하려고 김익두에게 물을 한 바가지 퍼서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김익두는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답니다. “옛날 김익두가 살았다면 당신은 죽었을 것이요. 그러나 옛날 김익두가 죽어서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순간순간 모욕을 받고 죄의 충동이 일어날 때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강해 일부. 죄에서 자유한 생활
로마서 6장 1-로마서 6장 11절
요절 로마서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장 강해 일부 끝.


로마서 6장 강해 이부. 거룩함에 이르는 삶
로마서 6장 12-로마서 6장 23
요절 로마서 6장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죄에서 자유한 삶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말했습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길은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예수님 안에서 산 자로 알고 여기고 믿고 예수님께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우리가 어떻게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지 실제적으로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욕을 순종치 말 것)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알고, 여기고 믿는 단계에서 이제는 순종의 단계로 나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나의 몸에 죄의 사욕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육신과 죄의 소원에 자신을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우리는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성령의 소원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육신의 소원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다시는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순종에서 드리는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본문에는 드리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드리는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게 드리는 생활을 잘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자신을 드리는 사람, 노름에 자신을 드리는 사람, 연애하는 데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쁨으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리고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한 번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드려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 양식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주님께 드리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룩하게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남 목자님은 거의 일 년 가까이 새벽기도를 나오고 이제는 아내도 항상 함께 나옵니다. 이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남 목자님은 사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가끔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드리다 보니 이런 곳을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 회사에서 망년회를 하기 위해서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다고 합니다. 내심 옛날의 기쁨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갔다고 합니다. 가서 보니 영 옛날 기분이 안 나더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남 목자님은 죄에서 멀어져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담배를 피우던 사람, 술을 먹던 사람 다이아 반지를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때부턴가 그 맛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우리)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4)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은혜로 의롭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마지못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다시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도우십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다 감당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순종하고 드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다시는 주관하지 못합니다.

(은혜를 이용하여 죄를 지을 수 없음)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앞에서는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지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으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예수님 아래 있으니 다시 죄를 반복하여 짓고 죄지은 것을 합리화하기 쉽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니 우리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세상 사람보다 더 못하게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요 구-파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고통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을 때 고통을 느낍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강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은 후에 받은 훈련을 알았다면 감히 죄를 짓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

사람들은 죄를 짓고 회개하면 되니까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 되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 의의 종이 되고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어려서 기침을 했습니다. 우리 집은 오남일녀로 다섯째인 나에 대한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침을 하면 집안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어 아주 좋았습니다. 기침이 나면 일부러 그치지 않았고, 기침이 나지 않을 때는 기침을 만들어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기침을 내가 그만두고자 했는데도 그칠 수 없어 고생했습니다. 그 후 얼마동안 천식이 있어 고생을 하는데 아마 그때 잘못된 생각으로 반복하여 기침을 해서 형성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을지라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빠져나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현재도 고통이고 죽어서도 고통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원해서 기침을 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원해도 기침을 그칠 수 없는 것과 같이 처음에는 내가 원해서 죄를 지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원해도 죄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술과 담배도 내가 원해서 마시고 피웁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내가 원해도 술과 담배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것을 종이라고 합니다.

(순종하면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7)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하여 준 교훈을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훈의 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과 의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자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행복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와 율법과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육체가 연약함을 이해하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따라서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부정과 불법에 자신을 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에 불순종하는 데 우리의 몸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십계명을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게임이 좋았고 음란 동영상이 좋았습니다. 우리를 사망권세가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제는 나의 몸을 의에게 종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겜에게 드리고 음란함에 드리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거룩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갑니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어느 때부터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의를 행하게 됩니다. 술을 먹으면 술에 중독이 되듯이 지속적으로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에 중독이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마음으로 순종하면 성령님이 우리를 주관하십니다. 성령님의 강권함으로 새벽기도에 나오고 말씀을 공부하게 됩니다. 점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딱 한 번만 죄를 짓자는 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딱 한 번 하고 나면 한 번 했는데 두 번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삼세번이라잖아’ 다음에는 ‘이왕 버린 것, 갈 때까지 가는 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의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게임을 하듯이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죄를 지을 때 부끄러운 열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20,21)

우리가 죄의 소욕을 순종하여 살 때 의에 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율법적인 요구에 대해서 자유롭게 활동하였습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는 데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는 무슨 열매를 맺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부끄러워하는 열매입니다.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죄의 마지막은 사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는 순간적으로 쾌락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허무함과 쓰디쓴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하나님의 채찍이 다가왔습니다, 나도 죽이고 다른 사람도 죽였습니다. 죽은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는 거룩한 열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22)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 종이 되고 우리의 주되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서 살자 우리는 거룩함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점점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마지막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부활의 새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는 점점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다가 죽은 후에는 부활의 영광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순간순간 육신의 고통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나올 때, 말씀 공부할 때, 예배드릴 때 육신을 약간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십자가를 지면 질수록 마음에는 성령께서 강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맛봅니다. 생명의 열매도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전도의 열매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 재림 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몸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몸을 적극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은 선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의 죄악된 행위에 의해서 사망에 이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그렇게 살았다고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삯은 당연히 사망을 당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죽은 후에는 부활하게 하십니다.

(성화의 길)

이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이요. 그리고 성령님의 생명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 모두 이제 그분을 믿어 드리고 매일매일 매초매초 그분께 자신을 드리고 그분의 소원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드립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의 길을 하루하루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징 강해 이부. 거룩함에 이르는 삶
로마서 6장 12-로마서 6장 23
요절 로마서 6장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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