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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로마서 9장 강해 1이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3 00:00:00
조회수 : 3,85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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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9장 강해 이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로마서 9장 19-로마서 9장 33
요절 로마서 9장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바울은 지금까지 진정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진정한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와 주권을 인정하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긍휼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의를 문제 삼는 불의한 자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에 다만 은혜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이 아닌가 불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불의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주권을 불의하게 행하지 않고 선하시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질문은 불의한 사람이 하는 질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일을 한 시간 한 사람이나 일을 열두 시간 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하루 품삯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하루 일한 사람의 품삯을 깎지 않고 다 주었습니다. 조금 일한 사람에게도 은혜롭게 하루 품삯을 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긍휼입니다. 아침부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조금 일한 사람에게 하루 품삯을 주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조금 일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불의하므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오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사도 바울은 그 질문에 대해서 “그럴 수 없느니라”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공의로우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는 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자나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키가 작은 것에 대해서, 외모에 대하여,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공의 속에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19절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 땅에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사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 땅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약속을 확실히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긍휼히 여길 만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십니다. 모세를 생각하사 이스라엘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어찌하든지 구원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만한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긍휼을 구하며 나가는 삶)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6)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달음박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경건해서 긍휼히 여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으니 십일조를 드렸으니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이 인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나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주시는 분도, 회개의 마음을 주시는 분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나가야 합니다. 회개하며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디메오가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며 나갔을 때 예수님은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세리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두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죄를 회개하며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바로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7,18)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가 불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시며, 오래 참으셨습니다. 오래 참았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세계 만방에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자를 완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의지나 사단의 의지 위에서 친히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완고하게 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요? 바로의 완고함에 하나님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완고함에도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많은 능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섯 가지 재앙을 통하여 천지 만물과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섯 번째 재앙부터는 하나님이 바로를 완고하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완고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표현입니다. 바로가 완고하게 된 것에 대해서 자신이 비난을 받으시겠다는 강하신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바로의 모든 잘못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의 죄를 다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대신 욕을 받으시는 너무나 좋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잘못을 다 내 탓이라고 하시는 어머니 같으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책임)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19)

하나님께서 절대주권 가운데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다면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책임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나님이 절대 주권 가운데 일하면 우리 인간은 책임이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다면 바로는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지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바로를 완악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내 책임이라고 하자 아들은 “그래요 나는 잘못이 없어요 아버지 잘못이에요”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은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스스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0,21)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는 토기장이 마음대로 토기를 만들 권리가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쓰임 받는 밥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하나는 천히 쓰임받는 화장실 변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기를 만들었다고 하여서 변기가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변기로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귀한 그릇은 자주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한 그릇은 자주 쓰임받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쓰임받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토기를 만드신 분이므로 잘못 만든 토기를 부술 수 있는 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되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서 그들을 새로 빚으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친히 그들이 회개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탓할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2-24)

둘째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만 인격적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그릇에는 진노의 그릇이 있고,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바로와 같은 자이고 긍휼의 그릇은 모세와 같은 사람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고 긍휼의 그릇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도 다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가 회개하기를 열 번이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아도 회개하지 않으면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바로가 열 번까지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의 장자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을 영접하지 않은 자에 대한 마지막 표현입니다.
심판은 우리가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암을 도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암을 잘라내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로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받을 자들이 회개하고 진노를 피하기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낸 것은 그들이 미래에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장자의 재앙에서 구원하시고 만나를 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주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선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따질 수 없습니다. 한 입양아가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키워 주신 부모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버림받은 자였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입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반면에 한 입양아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비뚤어졌습니다. 그는 한 여학생을 성폭행을 하고 토막살인을 하였습니다. 비교하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호세아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람둥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5,26)

호세아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결혼한 후에도 바람을 피우고 나가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남자가 낳은 아들을 데려다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순종하여 다른 사람이 낳은 아들 곧 내 자식이 아닌 자를 호세아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받을 수 없는 아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한 것을 통하여 고멜과 같이 음란한 이스라엘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영접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멜처럼 자격 없는 이방인을 부르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대적인 사랑으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허물할 수 없습니다.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이사야28:16)”(27-29)

하나님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남은 자만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자 많은 사람들이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킨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도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 느헤미야 스룹바벨 에스라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가랴 엘리사벳과 같은 자들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두 사도, 70제자, 120명의 성도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그 시대의 그루터기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믿음으로 출발은 많이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남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은 시대마다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쓰셔서 세계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행위를 의지하여 넘어진 유대인)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30-32)

바울이 결론적으로 왜 율법의 의를 좇아간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의를 좇아 살지 않은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초돌로 삼아서 인생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죗값을 다 갚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원과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긍휼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의 율법을 따라서 살던 유대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춧돌과 부딪히는 돌 예수님)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요 돌이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주춧돌이 되십니다. 인생의 기초, 구원의 기초가 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왕이요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는 사람은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천국까지 가는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심판의 돌이 그들에게 떨어져 가루가 되도록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진노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를 바라보는 눈)

이상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뜨릴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남은 자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믿음으로 나오는 자를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배웁니다. 우리는 남은 자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볼 때 우리는 불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되는 긍휼의 그릇)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있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살고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의 힘과 의지와 혈통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악에도 불구하고 절대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삼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새 이스라엘 삼으시고 우리를 쓰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9장 강해 이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79
로마서 9장 19-로마서 9장 33
요절 로마서 9장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로마서 9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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