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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로마서 5장 강해 예수 믿는 자의 축복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721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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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일부. 예수 믿는 자의 축복
말씀 로마서 5장 1-로마서 5장 11
요절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에버랜드에 가면 자유이용권이 있습니다. 이것만 갖고 있으면 그곳의 놀이 기구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처럼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은 예수님 안에서 자유 이용권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받는 축복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예수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불화의 관계였습니다. 이제는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형제는 자기 여동생과 불화했습니다. 한번 말다툼을 하고 거의 여섯 달 동안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매가 원수가 되어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합니까?
불화한 사람은 상대방도 불편하지만 자신이 더 불편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괜히 화가 납니다. 특히 우리가 힘 있는 사람과 불화하면 더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북한과 불화한 상태로 거의 육십 년을 살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남자들은 2년을 군대에 가야 했고 우리나라는 많은 국방비를 써야 했습니다. 북한이 무장공비를 보낸다든지 땅굴을 판다든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는다고 한마디 말을 하면 모두가 불안에 떨고 서울 땅값이 떨어졌습니다. 6.25 전쟁으로 남한만 2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국과 불화하다가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당했습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불화하면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셨구나. 하나님이 화나셨구나. 생각합니다. 감기만 한 번 걸려도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시는구나 생각하고, 직장만 조금 어려우면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이 맞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면 결국은 망합니다.
하지만 이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모든 것을 도와주십니다. 실제 하나님은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족 가운데 사고가 나거나 질병이 나도 이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주시는 믿음의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셔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화목함을 누려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우리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의 세계에 들어감을 입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계는 인과응보적인 세계입니다. 율법의 세계는 행위에 기초하여 생각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온전치 못함으로 우리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과거와 현재의 죄가 우리의 미래를 구속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소경으로 난 사람을 보며 누구의 죄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이냐 아니면 부모냐 아니면 하나님이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전생에 지은 죄까지 들추어내어서 미래를 어둡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은혜의 세계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 편에서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시고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축복하십니다. 죄악된 나의 내면이 변화되기까지 나를 훈련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부족한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나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함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는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전에는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지만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함께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더냐?”(요한복음 11장 40)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소망이 넘칩니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로, 율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래를 항상 긍정적으로 밝게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장 33)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얻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인디아나존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을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렇게 작가가 정해 놓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미래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이 영광을 생각하고 현재 즐거워합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환난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환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환난으로 슬퍼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런 환난도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시는 것이므로 환난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만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환난은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쓴 뿌리를 만들고 쓴 뿌리는 절망을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환난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주십니다. 인내는 오래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인내는 환난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하고 온유한 인격을 소유합니다. 인내는 연단을 만들어 줍니다. 연단은 niv성경에 character로서 인격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연단을 통하여 강하고 순수한 인격으로 단련됩니다. 쇠를 자르는 쇠나 우주선에 쓰이는 쇠는 집채만 한 망치로 내려친다고 합니다. 그러면 분자 간의 밀도가 가까워져서 더 강하고 단단한 쇠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환난의 망치로 우리를 내려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강하고 순수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하십니다.

(소망 중에 훈련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쓰시고자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를 깨끗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려 보내고자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크게 쓰시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환난의 망치로 치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을 내리치셨던 망치는 세상 사람들을 훈련시킨 망치와 다릅니다.
우리는 환난의 망치가 우리를 내려치실 때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처럼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들처럼 크게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말합니다. “주가 나의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 10)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소망은 절대적입니다 절대적인 소망이 있으므로 절대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성령님)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

우리가 이런 환난을 당할 때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한다는 생각을 심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사단은 꿈에까지 찾아와서 악몽에 시달리게 합니다.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고난을 주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정말 너를 사랑하신다! 이 고난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 표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수 목자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개척 목자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섬기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 천안 유비에프는 14개 캠퍼스 개척과 14명의 목자 교수를 키우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백 개 지부 개척과 오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성경 66권 강해서를 발간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꿈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우리 안에서 계신 성령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꿈대로 이루어 주지 않아도 우리의 꿈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확신시켜 주십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6-8)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하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습니다. 10절에는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만 골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먼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강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갈증을 채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당합니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굶주리기도 하고 헐벗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더 사랑하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할 때도 사랑하였는데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니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랑을 영접하고 사랑을 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저는 과거 예수님을 믿기 전에 정욕과 이기심과 불신과 교만과 자기사랑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저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죄악된 자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있습니다. 과거 죄악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는데 지금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더욱 사랑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더욱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때문에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소망에 불탈 수 있습니다.

(넉넉한 구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9,10)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음으로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므로 절대적인 소망, 절대적인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번 반복되는 두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단어와 ‘더욱’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육신을 가지고 있고 죄와 사단과 사망과 질병과 가난은 우리를 계속하여 공격합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고 학과공부를 하고 양을 칠 때 사단은 계속하여 공격합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목자 가정은 물질의 공격을 받았고, 한 형제는 질병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한 형제 모친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한 자매의 부친은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한 목자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시련 가운데서 넉넉히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고 치료를 받고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사 우리를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도와주십니다.

(현재보다 더 좋은 미래의 구원)

우리는 이 말씀에서 더욱이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갈수록 ‘더욱’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 더욱 구원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더욱 구원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기막히게 우리를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더욱 기막히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 구원을 밝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이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들 때 아내에게 이런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은혜가 너무 커. 나는 이제 이것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 나는 지금까지 은혜는 많이 받았지만 나의 영광스런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정말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미래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서 말씀 ‘더욱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기가 막히게 인도하신 것처럼 나의 미래도 더욱 기가 막히게 인도하신다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영광스럽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현재 누리는 즐거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우리는 이런 미래에 영광을 주신다는 확신으로 현재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미래에 승리한다는 확신은 현재 즐거움을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반드시 축복하신다는 증거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항상 즐거워합니다.
로마서 5장 강해 일부. 예수 믿는 자의 축복
말씀 로마서 5장 1-로마서 5장 11
요절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장 강해 일부 끝.


로마서 5장 강해 이부. 한 사람 예수님의 순종으로
로마서 5장 12-로마서 5장 21
요절 로마서 5장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받는 은혜를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다시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된 것을 한 사람의 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왔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롭다 하심과 생명이 오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원리)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그래도’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신을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죄악된 자신을 생각하면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사라집니다. 주위 환경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한 사람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류는 왜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까? 인류는 왜 다 죽게 되었습니까? 나의 죄악된 행위나 나의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저주를 받고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선악과를 먹지 않았는데 아담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원리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한 사람의 원리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까? 왜 일본에게 끌려 징병을 가고 정신대에 가고 세금을 내고 일본어를 배워야 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완용 한 사람이 한일 합방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왜 그들이 죽었습니까? 한 정신병자가 지하철에 불을 질렀고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지하철을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만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피해를 보고 죽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한 사람의 원리는 우리가 의롭게 되고 생명을 얻는데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찾아온 사망)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13)

인류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죄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죄를 인식하지 못해도 죽었습니다. 위암 환자가 자신이 위암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위암이 걸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위암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도 위암이고 위암이 커지면 언젠가는 죽습니다.
결국 인간이 죽게 된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고 바로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율법을 지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한 분의 의로운 행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담 때문에 찾아온 사망)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14)

우리가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역설적으로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왔다면 한 사람 때문에 구원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영향으로 우리는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하여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우리의 악행이나 선행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찾아온 은혜)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

우리가 일제 36년 가운데서 어떻게 독립하게 되었습니까? 물론 독립투사들이 일본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 연합군의 도움을 통해서 우리는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 천황이 대표자로서 항복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독립을 하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담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사단과 싸워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위하여 사단과 싸워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내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은혜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은혜로 죄와 사단과 사망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많은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주시는 선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아담이 주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담은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님 한 사람을 인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본문에 ‘말미암아’라는 말이 17번 반복되는 것은 이런 은혜의 세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에 이르게 했으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이런 모든 은혜와 의로움을 주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의 저주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그냥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축복은 반드시 믿음이 전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중요성)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7-19)

본문에는 한 사람의 범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범죄, 의의 한 행동, 한 사람이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아담한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중요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우리는 죄와 저주와 사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는 은혜와 축복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중요합니다.

(생명 안에서 왕 노릇)

본문에는 왕 노릇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였습니다. 왕이란 지배하고 통치하는 자입니다. 죄와 사망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짓고 사망권세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과 죄책감 가운데 살았습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 가운데 왕 노릇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됩니다. 사단은 왕 노룻하여 우리를 다스리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왕 노릇하도록 인격적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탄은 우리를 끌고 다녔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회장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장으로 세워주십니다. 우리는 회장님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장 노릇을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넘치는 은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20,21)

율법은 죄를 다 밝혀냈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를 깨달은 만큼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왕 노릇할 뿐 아니라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주관합니다.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사는 우리에게 은혜가 넘칩니다. 강에는 바위가 있어 배가 가려면 바위에 부딪혀 바위가 난파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불어나면 바위는 그대로 있지만 배가 바위에 걸릴 위험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항상 죄의 바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은혜의 강물이 넘치게 되면 더 이상 죄의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돌을 제거하지 않고 은혜의 강물을 더 많이 흐르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지만 예수님 안에서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의 강물을 더 흐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죄를 발견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마음은 죄와 사망 대신에 의로움과 은혜가 왕 노릇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강해 이부. 한 사람 예수님의 순종으로
로마서 5장 12-로마서 5장 21
요절 로마서 5장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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