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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마가복음 6장 강해1부 전능한 예수님, 무능한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3,70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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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강해 일부 전능한 예수님, 무능한 예수님
마가복음 6장 1-마가복음 6장 6
요절 마가복음 6장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님은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크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무능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능하신 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무능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인간으로 본 사람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은 지금까지 가버나움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한 손마른 자를 고치고,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정치지도자가 고향에 가면 대대적인 환영을 받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향이 전남 신안군인데 호남사람들이 다 그를 환영하고 대통령 선거 때 몰표를 찍어주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향이 경북 구미인데 영남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하고 몰표를 주었습니다. 정주영회장은 고향이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인데 고향에 소떼를 몰고 가서 북한 전체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이 고향인데 대구에 삼성 라이언스를 만들어 고향에서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서 환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에 가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고향에서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도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많은 고향사람은 예수님의 권능에 깜짝 놀랐습니다. 지혜의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들은 프랭카드를 들고 대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고향에 오셨다” 환영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이상하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2절에서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두 번이나 말합니다. 3절에서 또 이 사람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여 예수님을 다시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받고 변화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에도 화장실을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과 함께 공중 목욕탕에 갔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코도 골고 잠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이 헬라어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은혜 받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본 고향사람들)

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과 직업을 근거로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소문을 통해서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기 전에 예수님을 임신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버지 없는 사생아라고 비꼬았습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생아가 어떻게 메시야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와 누이들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동생들의 이름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을 구체적으로 대며 동생들을 잘 아는 듯이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누이들을 바로 옆에서 매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오락도 하고, 노래방도 다니고, 놀러도 다녔을 것입니다. 그들과 때로는 언성을 높이고 싸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형제들도 욕설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잘 아는 그런 동생의 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동생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업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수가 아니냐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전직은 목수였습니다. 목수는 건축가를 의미합니다. 당시에 목수는 사회적으로 가난한 하층민입니다. 목수는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많은 학식과 지혜도 필요 없는 직업입니다. 이런 목수 출신이 무슨 메시야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 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서기관 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박사도 아니었습니다. 교수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나무나 깎는 목수입니다. 집이나 짓는 건축가였습니다. 목수는 대부분 성격이 거칠다고 합니다. 그들의 집에는 예수님이 짠 농짝도 있었고 예수님이 만든 문짝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 집을 지어준 목수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또한 과거에 함께 놀던 어린 예수님의 모습으로 현재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예수님도 어려서는 똥을 싸고 오줌을 쌌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려서는 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석가모니처럼 태어나자마자 일곱발짝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키와 지혜가 자라셨습니다. 이런 과거에 기초하여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과거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 방탕하고, 과거에 불순종하고, 과거에 죄를 짓던 모습으로 현재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모습으로 사도행전의 베드로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모습으로 바울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의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외모로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보면 마른 덩클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아름다운 모양이 없다고 했습니다. 몸은 잘 먹지 못해서 마르셨습니다. 옷은 명품이 아닌 남루한 옷이었습니다. 그 옷도 자주 빨지도 못해서 꾀죄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즘의 목사님처럼 화려한 가운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어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으셨습니다. 남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외모로 보면 예수님도 별 볼일 없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키나 얼굴 생김새나 부나 지위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세상이나 사람을 향해 있는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키가 적고 말이 어눌하였다고 합니다. 대머리였다고 합니다. 더구나 사도바울은 간질과 같은 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열두 사도 출신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바울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가를 보아야합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고향 사람들처럼 지금도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을 모시고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의 비리에 기초하여 바라봅니다.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를 갖고 기득권 싸움을 하는 목사들에 기초하여 기독교가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외래 종교니 신토불이로 토속신을 믿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토속신이 무엇이 있습니까? 불교, 유교 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된 종교입니다. 우리의 토속신은 서낭신, 조왕신과 같은 것을 섬기는 샤머니즘입니다. 호랑이, 구렁이같은 것을 신으로 섬기는 토테미즘입니다. 호랑이나 구렁이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할 수 있습니까? 성경도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인간의 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오류가 있다고 다 무시하고 껍데기만 가지고 다닙니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이 쓰여진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람 뒤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또는 주의 종을 학력, 경력, 외모, 집안을 가지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방대를 나온 목자님, 학점이 나보다 잘 나오지 않은 목자님이라고 인간적으로 평가합니다. 나보다 못생긴 목자님, 나보다 노래도 못하고 운동을 못하는 목자님, 이렇게 생각하면 말씀의 은혜가 반감됩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주의 종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보는 사람도 있고, 연애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건물이나 성도수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오니까 교회가 너무 작고 초라합니다. 가정집과 같습니다. 성도수도 몇 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를 무시합니다. 천안중앙장로교회를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수영장도 있고 골프장도 있습니다. 무료로 악기를 배울 수 있고 원어민에게 외국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ubf도 큰 곳은 어린이 관현악단이 있어 가르쳐줍니다. 이런 큰 곳을 생각하면 작은 천안 ubf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큰 교회에서 대표 기도하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문을 작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모임이라고 예배를 맡은 사람들이 함부로 빠지거나 늦게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회를 보고 주의 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친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으로 친한 것이 결코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양들과 처음에는 인간적으로 선후배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친구로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혈연적인 관계로 초청할 수도 있습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좀더 영적인 데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목자와 양으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처음에 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가 지나면 목동, 목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예전엔 친구였어도 야! 이렇게 부르지 말고 목자, 목동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실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영적인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배척을 받았을 때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심령이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존경해 주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고향 사람들 외에는 다 존경한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외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이중부정으로 강한 긍정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자 고향 사람들 외에는 모두가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할 때 자신을 존경하는 많은 고향 밖의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때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보다 순종하는 고향 밖의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을 복음을 받아들일 세계 만민을 바라보셨습니다. 소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보면 배척하는 사람도 있고 불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배척하는 자들이 있을 때는 순종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될 것을 믿고 비전을 가져야합니다. 배척하는 사람들 외에는 다 존경할 것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권능을 행하실 수 없는 예수님)

5절을 보십시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 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는 무능한 예수님을 기록합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지금은 아무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무능한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고향에도 병자가 있었고 귀신들린 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고향에서 무능한 예수님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향 사람들의 불신 때문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그들의 믿지 않음에 놀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큰 것을 보고도 놀라고, 믿음이 없는 것을 보고도 놀라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을 때 일하실 수 없지만 믿음이 있을 때 크게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옷자락이라도 만지는 믿음을 보시고 혈루병 여인도 고치셨습니다. 야이로의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는 믿음을 보시고 야이로의 죽은 딸도 살리셨습니다. 백부장이 말씀만 해도 병을 고치실 것을 믿었을 때 종을 보지도 않으시고 말씀으로 고쳤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 같이 받았습니다. 그러자 삼주만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어부로 보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에게 절을 하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믄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는 눈이라도 빼어줄듯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때 갈라디아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바울을 인간적으로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때는 바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드릴 때 예수님은 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예수님을 믿어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어드려야합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드러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가운데도 크게 일하실 것입니다.

(결론 우리교회에 전능하신 예수님 모시기)

6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불신하는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다른 여러 마을에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서 모든 촌에 두루다니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리 모임이 인본주의 분위기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 모임을 떠나십니다. 그러나 우리 모임이 믿음의 분위기가 되면 예수님은 우리 모임에 오셔서 일을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어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불신이 있을 때입니다. 어떤 때는 성령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는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보는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 분위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비판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웃음꽃이 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합니다. 우리가 바이블아카데미를 마치고 나서 오월에 연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박 삼일로 스프링 바이블캠프를 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거의 모든 목자들이 이 방향을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다. 말씀 강사 분반 강사를 세우는 것도 내가 말하자 거의 모두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즉시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믿음의 분위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층에는 올해 들어 새로운 이학년 학생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는 것이 기숙사에서 사는 것과 비교할 때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일층에 사는 것이 주일날 방에서 뒹글 수 없다는 것 빼고는 다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사랑의 분위기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랑의 분위기가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믿음의 분위기가 될 때 하나님이 크게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분위기를 더욱 힘써 만드는 가운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껏 일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무능한 예수님이 아니라 전능한 예수님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한마디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전능하신 분이시다.
마가복음 6장 강해 일부 무능한 예수님
마가복음 6장 1-마가복음 6장 6
요절 마가복음 6장 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마가복음 6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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