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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빌립보서 3장 강해 2부(3:10-21)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6 00:00:00
조회수 : 4,305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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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강해 이부 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빌립보서 310-빌립보서 321

빌립보서 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흔히 우리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믿은 후부터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입니다. 마라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톤에도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세운 목표만큼 성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자신이 세운 목표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목표 없이 그날, 그날을 살아갑니다. 우리 성도들조차도 목표 의식이 불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표의식이 불분명하니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목표의식이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마라톤 선수와 같이 최선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달려가는 푯대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푯대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바울의 첫째 푯대는 그리스도와 부활과 고난을 아는 것입니다

 

10a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바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 이치나 진리를 배워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자전거 탈 줄을 안다고 말할 때처럼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연애소설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연애를 실제 해서 아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그런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나이도, 생일도, 결혼 날짜도, 몸무게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을 압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몸으로 압니다.

부부 사이에 아는 그런 깊은 관계입니다. 그 사람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한 없이 기쁘고, 그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 한없이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예수님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고, 예수님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체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을 하지 온 국민이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는 국가 대표팀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일치시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와 부활과 고난 세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요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과 가족과 물질과 교회의 주인인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모르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괜히 내가 덤태기를 씁니다. 이들은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 때 염려와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부활을 알고자)

 

둘째,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했습니다. 현재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부활은 파워입니다. 죽음을 이긴 파워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파워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망권세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망권세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것 같은 많은 박해를 부활신앙으로 이겨나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지만 바울은 그 루스드라에 다시 들어가 디모데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계속적으로 사망이 주는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실패의식에 시달립니다.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사단은 우리를 실패의 인생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알 때 이런 실패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알고자)

 

셋째,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부활만 알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알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본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는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와 슬픔을 가져가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로 세상에 대해서 죽고, 죄에 대해서 죽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됩니다. 죽은 자는 죄의 소욕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사람들의 모욕과 멸시에도 마음이 상해하지 않습니다. 혈기를 부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어찌하든지)

 

바울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어찌하든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라는 뜻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어떤 손해가 있든지 예수님을꼭 알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찼습니다. 그의 삶의 내적 목표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부활과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죽으심을 본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10b,11절을 보십시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자신의 유익을 죽이고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으로 육의 소원을 죽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에 이르는 길은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완전히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완전히 죽어야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고 고난 없는 승리도 없습니다.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매맞고 능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화를 안 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님 때문에 화를 낼 필요가 없는데도 죄와 싸우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때로는 싸우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 때문에 때로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인격이 손상되는 고통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 때문에 기도를 하고 예수님 때문에 공부도 하고 예수님 때문에 직장일도 하고 예수님 때문에 가정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부활과 십자가를 알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 자신 때문에 울고 나 자신 때문에 웃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열을 내고 자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 때문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모욕도 받고 내 뜻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죽으심을 본받는 사람이고 이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둘째 푯대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신앙생활을 하는 바울의 자세가 나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습니다. 소아시아 유럽 그리고 로마까지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약성서를 썼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미지, 성자의 이미지가 풍겨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잡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듯이 앞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앞서 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과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과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바울의 첫째 목표입니다.

그러나 잡힌 바 된 그것에는 그런 의미 외에 외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잡힌 바 된 그것은 바울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 바울의 둘째 목표입니다.

바울에게 잡힌 바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바울이 예수님의 포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잡으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맡긴 사명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그에게 선택권이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비록 그가 예수님께 잡혔을지라도 그는 평생을 예수님께 끌려가는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잡힌 바 된 후부터는 그것을 잡으려고 힘써서 좇아갔습니다. 좇아간다는 것은 온 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달려가는 그 한 가지에만 전념하는 것입니다. 그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는 과거 훌륭한 유대교인이요 바리새인이 되고자 힘을 썼습니다. 과거 그는 예수님 믿는 사람을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님이 주신 이방인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이 자신의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평생을 드렸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자세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은 것은 내가 원해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ubf에 세계 캠퍼스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코를 꿰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하나님 나라 건설의 목표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힘써 달려가야 합니다. 이제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써 사명을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명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달려가고 나에게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의 달음박질하는 자세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한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 중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구원 받기 전에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비참한 과거를 잊어버리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과거에 내가 이룬 업적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룬 업적은 나를 교만하게 하고 안일하게 합니다. 또 과거에 상처받은 받은 것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한 기억,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하던 못된 것, 취미, 그릇된 습관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악몽 같은 추억, 부끄러웠던 기억, 나빴던 관계, 실수했던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루었던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서 달려 나갔습니다. 마라톤 선수와 같이 전심전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에게 주신 사명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바울의 셋째 푯대는 부름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의 또 다른 삶의 목표가 나옵니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삶의 푯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상급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열두 사도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험담한다고 해서 자신이 하던 일에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는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상급만을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현재의 상과 미래의 상을 바라보고 나갔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일등별과 같이 빛날 것을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달려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상급만을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달음박질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상 받을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달려야합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달려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지 않으면 심판의 날 주님이 분명히 우리가 잘못 되었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징벌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너무나 당당히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이는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지어 죄인으로 있으면서 왕에게까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본 받은 것 같이 또 본을 보이는 자들을 보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팔로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팔로워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는 사도 바울을 본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본받아 살았는데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믿는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기를 권면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이 사람들의 삶의 푯대가 배에 있습니다. 그들은 좀더 잘 먹고 좀더 잘 입는 물질적인 생활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둘째, 그들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정욕적이거나 음란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정욕적이거나 음란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가정의 삶을 목표로 사는 자들입니다.

셋째, 땅의 일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 땅에서 잘 살고자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팔로워가 아니라 사단의 팔로워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마침이 멸망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끝에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이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광채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를 소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늘에 가셨다가 다시 오십니다. 코로나 펜데믹 시대에 재림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십니다. 그때에 우리의 부끄러운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강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변화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를 소망하는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을 것, 부끄러운 것, 이 세상의 것을 향해서 달려 나갑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신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더 높은 것을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목표를 이루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심을 본 받아 내 인생에 주신 푯대를 향하여 온전히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빌립보서 3장 강해 이부 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빌립보서 310-빌립보서 321

빌립보서 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장 강해 2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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