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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빌립보서 1장 강해 3부( 1:22-29)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1 00:00:00
조회수 : 4,80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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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장 강해 3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말씀 빌립보서 122-빌립보서 129

요절 빌립보서 127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받은 사람, 전해지는 복음의 내용, 복음을 전해준 사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복음을 받는 사람의 주관적 의미로 복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받는 편에서 복음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과 식물과 자연까지도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좀 더 좁은 의미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재림의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요 주인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이 전해지는 것도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믿고 권능을 받은 사람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하늘나라 시민으로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특권도 누리지만 책임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통해 복음이 전파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 아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사는 것에는 열매가 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노라."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둘 사이에서 끼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끼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햄릿이 사는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도 햄릿처럼 죽음과 삶 사이에서 둘 다 고통스러워 갈등하였지만 바울이 그와 다른 점은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먼저 바울은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것이 일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살아야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살아야 자녀 교육의 열매, 제자 양성의 열매, 세계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학과 공부의 열매, 직장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야 맛있는 로스구이도 먹을 수 있고 행복한 결혼도 할 수 있고 일대일 말씀도 전할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살아야 탁구도 칠 수 있고 신나는 춤도 출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천호지도 볼 수 있고 그림같은 단풍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육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 죽는 것이 더 좋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는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은 육신의 장막을 걷고 주님과 함께 있을 욕망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육신을 입고 사는 것을 장막(텐트) 생활에 비유하고 죽어서 주님께 가는 것은 맨션처럼 좋은 집에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죽어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모든 십자가를 벗고 편히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현재 사도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는 것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불편합니다. 추위와 더위에 시달려야 합니다. 매도 맞고 고문도 받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바울은 빨리 죽고 싶었습니다. 죽어서 참 평안과 자유를 얻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귀천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을 붙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우리가 소풍을 끝내고 집에 가면 씻고 편히 씻을 수 있고 섬겨주는 부모님이 계시고 맛있는 먹을 것이 잔뜩 있습니다. 우리는 소풍을 끝내고 빨리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기뻐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는 좀더 살고 싶다는 반어적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말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아동바동 살아가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애를 씁니다.

깡패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깡패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깡패는 싸움을 잘하는 깡패가 아닙니다. 내 배째 하며 가슴을 칼로 긋고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깡패입니다. 그러나 깡패는 악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두려움을 벗어나 기쁨으로 죽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용기 있는 삶입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깡패보다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깡패는 악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지만 바울은 기쁨으로 죽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결혼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결혼 날짜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우리의 신랑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죽음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잠자는 시간을 기다립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자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을 달콤한 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죄와 죽음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존 웨슬리도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웨슬리에게 오늘 밤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항상 죽음을 준비하며 살았기 때문에 오늘 죽는다 해도 특별히 다르게 할 일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어떤 분은 봄날 따뜻한 때 죽어서 주위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따뜻한 봄날 데려가셨습니다.

저는 언젠가 부흥회를 하는데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 강사는 자신은 죽기 전까지 새벽기도를 하다가 새벽기도를 할 수 있는 힘이 없어졌을 때 죽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간증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저도 가끔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제가 새벽 기도까지 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저의 기도입니다. 지금은 나의 묘지를 써놓고 비석을 세워놓고 살고 있습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좋지만 바울은 양들인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는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3) 바울은 양들을 위하여 더 살고자 한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이 좀더 살기를 원하는 이유는 자신이 돈을 좀더 벌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살기를 원하는 이유는 주위 사람들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살아도 남을 위해, 죽어도 남을 위해서 죽는 타인 중심의 목자였습니다. 그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은 구체적으로 타인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는 것이 더 필요하였습니다. 로마 시위대에게 복음을 전하고 좀더 세계선교를 하고 싶었습니다. 더 많은 옥중 편지를 써서 제자와 성도를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이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살게 될 때 빌립보 성도들에게 유익한 점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첫째,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믿음과 기쁨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양들에게 믿음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을 심었고 믿음의 본을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퇴보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예수 안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예수 안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울을 보고 예수를 믿고 싶은 소원이 일어날 만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신은 슬퍼도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더 크게 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쁠 때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장힉생이 되면 나는 장학생이 못되었어도 함께 기뻐해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양을 치면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슬플지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기쁨을 배가 시켜야 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기쁨을 배가 시키고 슬픔을 반감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더욱 배가 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도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

 

26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의 자랑이 바울을 인해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풀려날 때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기도를 해주어서 석방되었다고 빌립보 성도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들에게 명예를 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을 양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경을 썼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것이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살아서 자신의 자랑을 모두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랑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랑을 빼앗아 자랑합니다. 부하 직원이 올린 기안을 조금 바꾸어서 자신의 기안처럼 올립니다. 교수가 조교를 시켜서 글을 쓰고 자신이 쓴 것처럼 글을 냅니다. 학생들은 남의 리포트를 베껴서 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자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크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상대방의 기분, 명예, 자랑을 높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천안종로학원 때 아는 유선생은 정말 멋진 선생입니다. 그는 학생들의 마음을 알고 섬세하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반의 학생들은 정말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반 학생은 성적도 잘 나오고 탈락률도 적었습니다. 사람들이 유선생을 많이 칭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다 학생들이 착해서 나를 잘 따라 주어서 그래요."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이 학생들 때문이라고 학생들에게 명예를 돌립니다.

서양에서는 책을 쓰거나 사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내조한 부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도 자신의 자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밥을 사주고 성경 말씀을 주어도 자랑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 돈을 주며 이 도둑놈같은 놈아! 라고 한다면 그 자랑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랑을 살려주고 나의 자랑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멋진 삶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목사를 만나기만 하면 커피도 사고 먹을 것을 산다고 합니다. 일도 없는 그분이 돈이 어디 있어서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자식들에게 돈을 달라고 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자식들이 사람들에게 칭찬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돈을 달래서 일부러 쓴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자식들의 칭찬을 받게 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비록 돈을 받고 있지만 자식들에게 칭찬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은 삶)

 

요즘 살자니 괴롭고 죽자니 두렵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죽는 것도 더 유익하고 사는 것도 유익하니..."라는 말합니다. 바울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요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가 이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자기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양들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삶 속에 그리스도와 양들이 있으면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스커 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일주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러운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일요일, 일주일 내내 좋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매일 매일 천국과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더욱 좋다 한국에 있어도 좋고 선교사로 나가면 더욱 좋다. 집에 있어도 좋고 공동 생활을 하면 더욱 좋다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4)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

 

27a 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으면 그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들은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시민답게 행동해야 했습니다. 로마 시민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구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렵지만 반드시 헬라어로 말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양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반은 무위도식하며 풍류를 즐기며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이 해야 하는 의무도 많았습니다. 양반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한문책을 두 시간 정도는 읽어야 했습니다. 양반은 아무리 바빠도 뛰어가서는 안 됩니다. 비가 와도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으며 많은 특권이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부유하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을 믿는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첫째, 겸손히 협력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27b를 보십시오.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첫째는 겸손히 협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장군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심으로 서서 한뜻으로 합심할 때 일어납니다. 복음 역사에서 합심은 생명줄입니다. 어항 속에서 금붕어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는데, 결국 큰 놈이 작은 놈을 물어뜯어 죽게 했습니다. 큰 놈은 신이 나서 온 어항을 헤엄치며 먹을 것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죽은 물고기 시체가 썩으며 어항 물을 오염시켜서 큰 놈은 썩은 물을 먹고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합니다. 서로 사는 Win Win은 합심에서 시작됩니다. 합심을 위해서는 앞장 서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협력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협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름이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영광이 강한 사람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협력을 못합니다.

그러나 협력하는 사람이 없이는 앞장 서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산을 정복하여 태극기를 꽂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 중간에 많은 셀퍼들의 협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협력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협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종으로 살 때 서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다른 목자의 양에게 밥을 한 끼 사주고 함께 심방갈 때 따라 가는 것도 복음의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둘째,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28절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둘째는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멸망하는 꼬투리가 되지만 담대함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두려움은 사단이 주는 독약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 불에 일 호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담대해야 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몰아내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이름은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 함이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적자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복음의 대적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지만 대적자는 멸망하게 합니다. 반드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갑니다. 다만 때가 문제입니다. 때를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친히 승리를 주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속히 사단을 우리의 발아래 상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승리의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불신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적자가 날뛰어도 씩 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셋째, 고난도 각오해야 한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셋째,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고난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죄악된 본성과 싸우는 것이요, 반 신앙적인 세상 풍조와 싸우는 것입니다(30). 싸움을 싸우는데 쉽고 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쉽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가끔 이상한 집단에서는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고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후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조금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친척이나 돈을 버린 자는 백배의 영광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힘써 기도의 고난, 소감 쓰는 고난, 그리고 순종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큰 영광을 주실 줄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도 복을 주십니다.

 

(결론 복음에 합당하게 고난을 받자)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은 삶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현재 기쁨이 충만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충만히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본받는 삶입니다. 기쁨으로 살아서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윤동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가 괴롭지만 그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맛보고 많은 생명이 살아남으로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과 기쁨을 주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빌립보서 1장 강해 3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말씀 빌립보서 122-빌립보서 129

요절 빌립보서 127절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빌립보서 1장 강해 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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