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빌립보서 3장 강해 1부( 3:1-9)가장 고귀한 것은 무엇인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6 00:00:00
조회수 : 6,018

문제지풀이(2)

    iconB_11257A.hwp  (11.50KB)

    iconB_11257B.hwp  (29.50KB)

빌립보서 3장 강해 일부 가장 고귀한 것은 무엇인가 102

말씀 빌립보서 31-빌립보서 3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8a)

 

발리섬의 결혼에는 이런 풍속이 있다고 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 소를 주고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보통은 소 두 마리를 주고 예쁘지 않거나 지혜가 부족한 여자는 소 한 마리를 주고, 예쁘고 지혜로운 여자는 소 세 마리를 주고 데리고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랑이 신부에게 소 다섯 마리를 주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여자가 본인 생각에도,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에도 다른 여자들보다 더 예쁘거나 똑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자는 왜 자신에게 소 다섯 마리를 주고 사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신랑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소 다섯 마리가 아니라 소 5백 마리를 주어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는 자신을 조중히 여기는 신랑을 최고로 여기고 평생을 신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결혼 전을 잊고 기쁘게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그를 위하여 소 다섯 마리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서 가장 귀한 자신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최고로 여기며 기쁨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를 기도합니다. 아멘

 

(주안에서 기뻐해야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끝으로는 결론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결론적으로라고 하면 이제부터 하는 말이 중요하니까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전할 때 졸더라도 결론은 잘 들어야 합니다. 평생 부모님 말씀은 안 들어도 유언을 잘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빌립보서의 주제를 말합니다. 바울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빌립보서에서 16번이나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남보다 좋은 여건의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보고 기뻐하라면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불행한 여건에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조건이 좋아 보이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나는 괴롭지만 너희는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218절을 보면 자신이 먼저 기뻐하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내가 기뻐하고서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목자는 자신이 기뻐하면서 양들에게 기뻐하라고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기쁘게 살면서 자녀들에게 기쁘게 살라고 해야 합니다. 음식 먹을 때도 내가 맛있게 먹으면서 남에게 맛있게 먹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바울은 인간적으로 보면 기뻐할 조건이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죄인으로 있습니다. 감옥에는 먹을 것도 시원치 않고 입는 것도 좋지 않고 잠자리도 불편합니다. 무엇보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기뻐할 조건은 단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을 인해서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 한 분을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양들이 좀 없어도, 학과성적이 좀 안 좋아도, 집에 돈이 좀 없어도, 건강이 안 좋아도 주님을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하바국3:17,18) 그러면 우리는 주안에서 무엇을 기뻐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인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다음은 주님께서 현재 나의 주인 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현재 나의 마음 속에 주인으로 들어와 살아계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나는 고난을 받아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죽어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인해서 기뻐한다면 기쁨이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뻐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해서 채찍을 맞을 때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욕을 받아도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망해도 예수님의 이름이 흥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주신 하늘나라의 소망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육체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확신이 있다면 돌에 맞아 죽는 극단적이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그 보다 덜한 고통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세상적인 기쁨과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적인 욕구 충족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배고플 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추울 때 따뜻한 옷을 입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지적 만족에서 오는 기쁨도 아닙니다. 공부하거나 이치를 깨닫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기쁨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서 얻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이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명령)

 

바울은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기쁨은 자연적인 것 같은데 왜 기뻐하라고 명령할까요? 기쁨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맛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입맛은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이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내가 해주는 음식이 맛이 있습니다. 아무리 입맛이 없는 사람이라도 며칠 굶기면 밥맛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기쁨은 훈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걷게 되면 걸을 수 있는 것 자체를 기뻐합니다. 감옥에 있던 사람이나 군대에 있던 사람이 자유인이 되어서 돌아다니면 돌아다니는 것 자체로 기뻐합니다. 며칠 간 굶던 사람이 밥을 먹으면 반찬이 없을지라도 밥만 있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훈련을 시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훈련을 맛보기 전에 언제나 기뻐해야 합니다.

이 기쁨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쁨이 있을 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기쁨으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쁠 때 면역력이 생기고 건강해집니다. 기쁠 때 창조적인 지혜가 생깁니다. 기쁠 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기쁠 때 화평이 있습니다. 기쁠 때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뻐하다 보면 기쁨의 조건들이 생깁니다. 기쁨이 확산되어 나타납니다. 바울이 기뻐했을 때 기쁨의 조건들이 생겼습니다. 기뻐했을 때 감옥 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기뻐했을 때 빌립보 감옥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바울만 기쁜 것이 아니라 빌립보 전체가 기쁨을 함께 누렸습니다.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수고로움이 없고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기뻐하라고 반복하는 것을 수고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빌립보 성도들 편에서도 안전합니다. 중요한 사항은 반복해야 합니다. 실천하기까지 반복해야 합니다.

 

(육체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바울은 지금 주 밖에 있는 자들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과 몸을 상해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입니다. 몸을 상해한다는 것은 몸에 할례를 하는 율법주의자를 의미하고 바울은 이들을 개들이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한 마디로 개와 같은 자들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지방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 없는 개들이 떼를 지어 다녔다고 합니다. 개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멍멍 짖고 싸우며 야단이었습니다. 개들 때문에 집 단속을 잘 해야 했고 여행 다닐 때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런 개들은 똥을 먹고, 썩은 고기를 먹고, 시체를 뜯어 먹습니다. 개는 토했던 것을 다시 먹습니다. 음란하기도 합니다. 아무데서나 부끄러운 짓을 합니다.

율법주의 신자들은 개들처럼 몰려다니면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끊임없이 교회 안의 성도들과 싸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였지만 속으로는 개처럼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으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밖에 있는 자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 밖에서는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주밖에 있다면 우리는 슬퍼하고 금식해야 합니다. 주님 밖에 있으면서도 기뻐하면 화가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기까지 우리는 통곡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삼갈 것을 이야기 한 다음에 어떤 성도가 주 안에서 기뻐하는 참된 성도가 무엇을 자랑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 신자들과 다릅니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 자기 성실, 자기 힘으로 봉사하지 않습니다. 봉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봉사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봉사하고 나서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주신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하여 개와 같이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겉도 깨끗하지만 속도 깨끗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 안에서 기뻐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자랑할 것이 많습니다)

 

4-6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제 바울은 자신도 만약 자랑하고자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처럼 자랑할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부터 유대인으로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에서의 후예가 아닌 이스라엘의 후예로서 선민입니다. 그는 12자파 중에서 북이스라엘 지파가 아닌 남유다에 속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는 히브리말을 할 줄 아는 순종 히브리인이요. 그는 율법을 철저히 행하는 구별된 6000명의 바리새파 사람이요. 그는 교회를 핍박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율법주의신자들보다 자랑할 것이 더 많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 그는 가말리엘 문하의 학자요.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철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낙원에 끌려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여러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신약 성경의 반을 기록하였습니다. 소아시아와 유럽과 로마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랑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자신이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해롭다는 것은 현재 고통을 주는 것, 손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게 소중하던 것이 이제는 소중하지 않고 무관심할뿐더러 앞으로는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소중하던 것이 가장 고상하신 예수님을 얻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얻는 데는 항상 덜 소중한 것이 방해가 됩니다.

우리의 학벌, , 머리가 좋은 것이 예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 번 반에서 1등한 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것이 예수님을 믿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실패 없이 살아온 것이 겸손에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유익한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해로 여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해로 여길 뿐 아니라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잃어버렸다하면 도둑맞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일부러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도 졸려서 잘 때가 있고 일부러 잘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고 싶은 때 자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것은 곧 바로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이런 것은 사도 바울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이제 잊어버린 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잃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배설물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똥입니다.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까이 하면 내 몸이 더러워질 테니까 다시는 가까이 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멀리 내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좋았던 밥이 이제는 배설물이 된 것입니다. 그는 자랑하던 과거를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소중한 것을 알면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좋던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겔력시 21을 가지면 투지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 좋은 가문, 학벌, , 권세를 버릴 수 있습니다. 술이나 다이먼드 반지가 하찮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재밌게 겜하던 것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 친구 취미 담배를 버릴 수 있습니다.

로케트처럼 포기하고 아주 버리는 추진력에 의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뒤로 버릴 것은 쑥 버려야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 얼마나 깨끗이 버렸느냐에 따라서 그 만큼 더 나가게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잔뜩 부여잡고 있는 한, 애만 쓰고 버둥거릴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발전이 없고 진취가 없습니다.

소화가 안 되어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먹을 수도 없고 에너지도 공급받지 못합니다. 변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고통이 많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얻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내가 좋던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유익하던 것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예수님이 가장 고귀하였습니다)

 

8a을 다시 보십시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바울에게 예수님은 가장 고상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상하다는 것은 가장 고귀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장 고귀한 분이십니까? 서론에서 발리에서 소 다섯 마리를 주고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지요? 예수님은 나같이 무가치한 자를 위해서 소 5마리가 아니라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나를 가장 가치 있게 여겨주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실 뿐 아니라 살아나셔서 내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시고 나의 생명이 되어주셨습니다. 나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가장 고귀한 분으로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요 나의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목적이고 다른 것은 수단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관의 변화가 뿌리로부터 근본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런 것이 소중했으나 이제는 저런 것이 소중해집니다. 전에는 이런 일에 미쳤으나 이제는 저런 것에 관심을 쏟습니다. 전에는 이런 것이 유익했으나 이제는 그런 것이 해롭습니다. 취미도 생각도 행복관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런 것 때문에 기뻤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비참해집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 수 없는 자기만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린 아이들이 위험한 칼을 가지고 놀 때 그냥 빼앗으려고 하면 놓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휠씬 더 좋아하는 것을 주어서 스스로 버리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고 보니 이제 나머지 문제는 시시해집니다. 예수님이 신비롭고 좋기 때문에 세상것이 더럽고 해롭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 좋았던 것이 지금도 좋고 겜하는 것이 지금도 끊을 수 없는 사람, 명품을 보면 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그리스도를 온전히 고귀한 분으로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는 서로 아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서로 부둥켜 안고 있다고 해서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떤 분인지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자녀가 그 의미를 알 때에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알면서부터 고맙고 인격과 인격이 통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느끼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랑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나의 생명의 주가 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나니 내게 새생명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바울은 가장 고귀하신 예수님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알고 배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나의 인격이 되고 예수님의 비전이 나의 소망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토마스아퀴나스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재산 명예 건강 아름다움 얼마나 가진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만을 원할 뿐입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장 소중한 예수님을 소유하였다고 말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불쌍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이 다 나쁘고 다른 사람의 가진 것이 다 좋아 보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남편도 남의 남편이 더 좋아 보이고 아내도 남의 아내가 더 좋아 보입니다. 물론 자기 것만을 지나치게 위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저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자님이 가장 훌륭하고, 내 아내가 가장 예쁘고 나 남편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 자녀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내 부모가 최고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훌륭해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부부의 가치를 발견하면 외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알면 이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마음도 이런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순교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9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왕년에 자신의 인간조건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이요 히브리인이요 공부를 잘 하고 가문이 좋은 것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았습니다. 소똥벌레는 소똥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데, 그런 소똥벌레는 소똥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배설물과 같음을 안 이상 그 안에서 발견된 자신 또한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제 가장 고상한 지식인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의로와졌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존재의미를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였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천하보다 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사도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가끔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 믿어서 손해 많이 보았습니다. 마실 것 못 마시고, 먹을 것 못 먹고, 가고 싶은 것 못 갑니다. 특히 주일 날 친구들과 놀러 가지 못합니다." 여기 있는 분 가운데도 예수님 믿고 손해 보신 분이 있습니까? 그런 손해는 많이 볼수록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얻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손해보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서론에서 소 다섯 마리가 신부의 가치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소 다섯 마리가 아니라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가장 고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나만 그렇게 여겨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나의 아내도 소중하고 남편도 소중합니다. 나의 부모님, 나의 목자님, 나의 교회도 소중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주신 우리 예수님을 알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할 때 예수님만이 가장 고귀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유익하던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기 쉬운 것이 많습니다. 돈도 그렇고 사람들의 인정도 그렇고 세상적인 쾌락도 많습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여우 같은 요혹자도 있습니다. 교회를 파괴하는 이단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를 소중히 여기고 예수님 안에서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예수님 안에서 교회를 소중히 여길 때 이런데 빠지지 읺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최고로 여길 때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와 나에게 주신 것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8a)

빌립보서 3장 강해 일부 가장 고귀한 것은 무엇인가 102

말씀 빌립보서 31-빌립보서 3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8a) 빌립보서 3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0 [빌립보서] 빌립보서 4장 강해 2,3부(4:8-21) 일체의 비결 오요한 2005-03-16
9 [빌립보서] 빌립보서4장 강해 1부( 4:1-7) 어떻게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오요한 2005-03-16
8 [빌립보서] 빌립보서 3장 강해 2부(3:10-21)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오요한 2005-03-16
7 [빌립보서] 빌립보서 3장 강해 1부( 3:1-9)가장 고귀한 것은 무엇인가? 오요한 2005-03-16
6 [빌립보서] 빌립보서 2장 강해 3부(2:19-30) 이와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오요한 2005-03-16
5 [빌립보서] 빌립보서 2장 강해 2부(2:12-18)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 오요한 2005-03-11
4 [빌립보서] 빌립보서 2장 강해 1부( 2:1-11)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오요한 2005-03-11
3 [빌립보서] 빌립보서 1장 강해 3부( 1:22-29)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오요한 2005-03-11
2 [빌립보서] 빌립보서 1장 강해 2부(1:12-21)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오요한 2005-03-11
1 [빌립보서] 빌립보서 1장 강해 1부(1:1-11) 절대적인 감사와 기쁨 오요한 2005-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