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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27장 강해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30 00:00:00
조회수 : 5,081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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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7장 강해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사도행전 271-사도행전 2744

요절 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가이사랴에 호송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릭스 총독이 로마로 소환되고, 베스도가 새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의 조언을 듣고,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이샤라에서 로마로 가던 바울이 탄 배가 광풍을 만나 파선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조난을 당해 구원의 여망이 끊어진 276여명의 승객을 구원한 사건입니다. 리더는 위기의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잘 짜인 조직과 질서 속에서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하면 기존의 질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리더십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을 배에 탄 사람들의 리더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리더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리더십은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병으로 누가가 동행하는 은혜)

 

“1.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바울을 포함한 죄수는 아드라뭇대노 배를 타고 로마로 가고자 작정되었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본문이 사도행전에서 네 군데 있는데(16 :10-17 20:5-15 21:1-18), 이곳이 마지막 네번째입니다(27:128:16). 본문의 우리는 21:1-18 이후 2년 만에 처음 나오는 셈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2년간(24:27)은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상태였고 또한 기록의 초점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집중되었으므로 우리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누가가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 바울이 기이샤라를 떠나 로마로 이송되는 시점에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다시 합류하게 되었고 누가는 다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물론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을 포함한 죄수들을 호송하였습니다. 아구사도대는 당시 로마의 한 군대 조직인 듯합니다. 아그립바 왕의 친위대(새번역)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와 지방의 주둔군 사이의 연락 업무를 맡은 부대로서, 프르멘타리(frummentarii)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구사도대는 로마 황제의 직할 부대로서 전방 부대를 지도, 통제, 연락하는 친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이송하는 아구사도대의 인솔자로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율리오(율리오스)는 가문명家門名일 뿐입니다. 바울과 함께 호송된 죄수들의 죄질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들이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로 로마 원형 극장에서 맹수들의 싸움 대상으로 보내어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탄 아드라뭇데노 배는 아드라뭇데노라는 항구 도시에서 온 배인데, 아시아 지방에서 서방을 오가는 무역선인 것 같습니다. 아드라뭇테노는 소아시아 북서해안에 위치한 무시아의 항구 도시이며 레스보스(Lesbos) 섬 맞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들이 탄 배는 소아시아 해안올 따라 운항하는 비교적 적은 규모의 연안무억선이였으므로 그것을 타고 지중해를 건널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간 어디에선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큰 배로 바꿔탈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이사랴를 출발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로 로마로 향하는 큰 배를 타는 것이었으나 때 맞추어 그런 배틀 만나지 못한 듯합니다.

일행 중에는 데살로니가의 아리스다고와 이 글의 저자인 누가도 있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누가는 의사로,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시중드는 자로 함께 승선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병이 있었던 것이 누가를 따라다니게 했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병이 바울에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게 하였으니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혹자는, 이 두 사람이 바울의 노예로 자처하여 동행함으로써 백부장 율리오의 눈에 바울을 중요한 인물로 보이게끔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아리스다고는 빌레몬 24절과 골로새 410에서 바울의 동역자요 함께 갇힌 자로 재등장하는데, 이 두 서신이 로마 감옥에서 씌어진 것이라고 볼 때 아리스다고가 바울의 로마 여행에 계속 동행했음은 분명합니다.

 

(시돈에서 구브로 해안으로)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이튿날 바울 일행은 시돈에 배를 대었습니다. 시리아 해안의 조류는 북쪽으로 흐르는데,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이 조류를 따라 약 23시간 가량 걸려 시돈에 도착한 것입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3절과 43절은 백부장 율리오의 특별한 친절을 보여 줍니다. 아마 베스도는 바울을 율리오에게 넘겨주면서 다른 죄수들처럼 다루지 말고 관대하게 대우하도륵 특별히 지시를 하였을 것입니다. 율리오도 바울의 언행과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누가와 아리스다고)의 극진한 시중을 보고, 결코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 배는 짐을 내리거나 싣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율리오는 이 시간 동안에 바울이 시돈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여기서 친구들은 스데반의 순교 후에 각지로 흩어진(8:1) 성도들 가운데 시돈에 자리잡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친구라는 명칭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던 칭호였습니다.(요삼 15). 황제 앞에서의 재판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고, 또한 항해를 하는 중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한 여정 가운데서도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시돈을 떠나 행선할 때에, 누가 일행은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서 항해하였습니다. 그들을 태운 배는 출항하여 구브로의 남서 해안을 지나 아드라뭇데노로 직항하고자 하였으나 동쪽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서풍을 만나 더 이상 직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불가피하게 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구브로 섬 동쪽 해협을 따라 우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라 시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누가 일행은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이르렀습니다. 배는 구브로를 서쪽에 두고 북상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을 지나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이 항해는 그 해안을 따라 흐르는 해류와 밤에 대륙에서 바다를 향해 부는 대륙성 기류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을 이 항해는 그럭저럭 소아시아의 가장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루기아의 항구 무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소요된 항해 기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서방 사본에 의하면 14일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무라 항은 애굽에서 오는 곡물을 로마로 보내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무라 성읍은 항구로부터 내륙 쪽으로 약 3.2 Km거리에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을 태운 아드라뭇데노 배는 가이사랴에서 무라까지 항해하였고, 무라에서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내려주고 계속해서 아드라뭇데노로 향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바울과 누가 일행을 그 배에 태웠습니다. 이달리야(이탈리아)는 로마를 수도로 하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리킵니다. 본문의 알렉산드리아 배는 곡물 운반선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로마 제국의 주요 곡창지였고, 거기서 생산되는 곡물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곡물선을 통해 로마로 운송되었습니다. 곡물선들은 알렉산드리아 항을 떠나, 그레데 남방을 거쳐 로마로 직접 항해하는 것이 빨랐지만, 대부분의 선박들은 풍향 사정 때문에 무라 항을 거쳐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올라탄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전형적인 곡물 운반선이었지만(38), 여객선 역할도 하며 무려 276명이나 되는 사람을 태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배들이 많았는데, 개인기업의 소유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로마 정부와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로마정부에 대해 의무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바울 일행을 배에 태우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니도에서 미항으로)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누가 일행은 여러 날 동안 천천히 항해하여, 겨우 니도 앞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무라를 출발한 배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다가 강한 북서풍을 만나 매우 어려운 항해 끝에 겨우 니도에 이르렀습니다. 간신히 라는 말을 통하여 많은 고생을 하면서 어렵게 항해하여 니도에 다다랐음을 말해줍니다. 니도는 소아시아 서남단의 도리스 반도 서남쪽 끝에 있는 도시로 무라에서 약 223Km정도 떨어져 있어서 순풍을 등지고 항해할 경우 이틀 정도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 정도의 거리를 여러 날 걸려 힘겹게 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항해였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니도는 아시아 지역의 자유 도시였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하여 에게해를 가로질러 가려는 배들이 서쪽으로 항해하던 중 마지막으로 기항(寄港)하는 항구였습니다. 그런 만큼 니도항의 규모는 제법 컸고 정박하는 배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일행은 맞바람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살모네 앞 바다를 항해하여 지나갔습니다. 무라를 출발한 배는 니도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려 했습니다. 그레데 섬을 남쪽으로 바라보며 에게해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역풍을 받지 않고 순풍만을 의지할 수 있을 때 가능한 항로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니도에 이르렀을 때는 북서풍이 너무 강하여 더 이상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니도에 머물면서 순풍이 불기틀 기다리든지 아니면 본문에서처럼 니도에서 남하하여 살모네를 지나 그레데 섬을 바람막이로 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레데 섬은 그리이스 본토에서 남쪽으로 100Km정도 떨어져 있는 지중해의 큰 섬들 가운데 대표적인 섬으로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 섬의 동서 거리는 약 255Km 정도이고 남북의 거리는 10Km에서 50Km에 이르는 좁고 길쭉한 섬입니다. 좁고 길다란 이 섬을 방파제 삼아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북서풍이 상당히 많이 차단되므로 항해는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디도서 1:5에 의하면 그레데 섬에도 교회가 있었고 디도가 그곳에 파송되어 사역을 한 적도 있습니다. 본문의 살모네는 그레데 섬의 동쪽 끝의 돌출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레타 남쪽 해안을 따라 겨우 항해하여,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에 닿았습니다. 이 도시는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미항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항구라는 뜻인데 이곳은 지금도 동일한 뜻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fair) 이라는 말은 이 항구의 좋지 않은 특성 때문에(12) 비꼬는 식으로 불리어지었습니다. 이 미항은 그레테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남해안의 자그마한 만()만으로 오래도록 머물 만한 곳은 못되나 잠시 바람을 피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레데섬이 바람막이 역활을 해주었지만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 준 것은 아니어서 항해는 결코 쉽지가 않았고 따라서 미항에서 쉬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는 항해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간신히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7). 라새아 성은 이곳 미항에서 동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바울은 시돈, 구브로 해안, 길리기아, 밤빌리아, 무라시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고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곳이 이르렀습니다.

 

(미항에서 겨울을 나자는 바울)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하였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디스리(Tishri)(태양력으로 9-10월경) 10일에 지켜졌던 속죄일을 의미합니다(29: 7-11). 브루스에 의하면 로마 여행 당시인 A.D.59년의 속죄일은 태양력으로 105일경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이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여행 경험이 있었고 또한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하여 위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고후 11:25). 따라서 바울은 항해를 중단하고 겨울을 지낸 후에 다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하였습니다. 이 바울의 말이 나중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점을 고려하여(18, 19, 38, 41), 하나의 예언으로 보기도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그의 경험적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통하여서도 섭리하십니다. 바울은 일반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지금 항해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욕심이 없이 순수한 상태에서 말하였습니다.

 

(안전보다 편리한 것을 찾은 사람들)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선장과 선주는 겨울을 지내기에 편리한 뵈닉스 항구에서 머물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보다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바울과 선주측 (선장은 포함)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겨울을 이곳 미항에서 나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주장했고(10), 선장과 선주는 다른 곳에서 보내자고 주장했습니다(12). 여기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백부장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그 백부장이 이 배에서 가장 높은 로마의 장교였고, 그 배는 로마 정부와의 계약 관계로 로마의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입장으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고 있는 바울의 말보다는 항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21, 22)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제안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 배의 운명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됩니다(10).

미항은 겨울을 보내기에 불편하여 아무쪼록 뵈닉스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하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공동 번역에는 그 항구는 겨울을 날 만한 곳이 못 되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과동(過冬)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겨울을 통과하는 것이므로 겨울을 나는 것을 뜻합니다. 미항이 만이 적고 추워서 겨울철의 거센 폭풍을 견디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뵈닉스는 감람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레데 섬의 서남쪽 끝에 있으며 미항으로 부터는 약 6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오늘날에는 루트로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미항에 비해 겨울을 나기에는 적합한 곳입니다.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나자고 하는 의견과 미항에 머물면서 겨울을 나자는 의견으로 갈린 듯하며 뵈닉스를 지지하는 자가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편하게 보내고자 하는 욕심이 들어가서 상식을 어긴 것입니다. 욕심이 있다 보면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레대 항구는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했습니다. 서남 서북을 향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남서를 향하여 그리고 북서를 향하여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개역성경의 동북, 동남을 향하여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뵈닉스 항구의 양쪽 입구가 각각 북서쪽과 남서쪽에 있고 서쪽면에는 큰 만이 있어서 마치 이 항구가 서쪽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유라굴라 광풍을 만남)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그들이 대부분의 의견을 따라서 출항한 얼마 후에 유라굴라라는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때마침 불어준 남풍은 미항에서 뵈닉스로 옮기기로 한 결정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안심하여 닻을 감아 올리고 그레데 해변에 바짝 붙어 서쪽으로의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순풍에 의지하여 순항을 하던 배가 마다라곶을 돌아서 멧세라만에 들어서자 갑작스런 태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광풍은 태풍을 말합니다. 유라굴로는 동풍을 뜻하는 말과 북풍을 가리키는말의 합성어로 동북풍입니다. 이 바람은 지형의 영향으로 생기는 바람인데 남풍이 그레데섬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2100 Km 높이의 이다(Ida)산맥으로부터 생기는 두 반대 기류의 충돌로 생긴 태풍에 휩싸이면서 강력한 북동풍이 변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바람을 만나면 배는 방향을 조절할 수없는 상태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히면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룻배를 끌어올림)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a끌어 올리고

 

배가 폭풍에 휘말려서,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누가 일행은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라굴로에 걸려든 배는 바람이 불어가는 대로 밀려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선장 이하 선원들이 배를 조종 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 채 바람과 파도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로서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배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일행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쪽을 따라 밀려 갈 때에, 그 섬이 어느 정도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으므로, 그들은 간신히 거룻배를 안전하게 쓸 수 있게 손볼 수 있었습니다. 가우다는 본문의 표현대로 작은 섬이며, 뵈닉스에서 남서쪽으로 35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습니다. 배는 상당한 거리를 떠밀려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가 가우다섬 아래로 밀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섬이 조금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선원들은 배고물에 매달려 위태했던 거룻배를 갑판 위로 끌어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 거룻배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구명보트와 같은 작은 배입니다. 대체로 거룻배는 배고물에 매달아 끌고 다니지만 거친 폭풍을 만나면 배에 부딪혀 파선될 위험이 있으므로 갑판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이 거룻배는 큰 배가 암초에 걸려 파선하게 될 경우 타 항구 시설이 없는 곳에 비상 상륙을 해야 될 경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룻배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폭풍은 여전히 몰아쳤으므로 그것을 끌어 올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누가는 7절에서와 같이 간신히 라는 표현을 쓰고있습니다(16).

 

(짐과 배의 기구를 버림)

 

“17b.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배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밀려가고 사흘째에는 배의 기구들도 버렸습니다. 선원들은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가 끌어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동여매었습니다.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은 것은 배를 조금이라도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는 배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했므로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배의 견고성을 강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돛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고 있었습니다. 스르디스는 바다에 있는 모래톱, 모래 수렁, 또는 유사(流砂)를 가리킵니다. 그레데 서남방으로는 이 스르디스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큰 것으로 구레네 서쪽의 아프리카 해안에 있고, 다른 하나는 작은 것으로 카르다스 부근에 있습니다. 본문의 스르디스는 큰것(Syrtis Major)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스르디스에 걸리면 배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선장은 아직 스르디스와는 먼 거리에 있지만 미리 연장을 내려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오면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므로(20), 언제 스르디스까지 밀려갈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연장은 배에서 사용되는 것들, 그러니까 돛, 돛대, , 밧줄, 등을 가르키는 것으로 봅니다. 결국 배의 선원들은 배가 서남쪽으로 떠밀려 가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하여 돛을 내리고 닻을 내리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폭풍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는데, 다음날 선원들이 짐을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폭풍이 조금도 약화 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져서 폭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해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버리는 장면은 요나서 15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점점 차는 바닷물로 인해 무거워진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갑판 위에 있던 수하물을 버린 것입니다. 셋째 날에는 그들 스스로 배의 장비마저 내던져 버렸습니다. 많은 짐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 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은 배의 기구를 버려야 했습니다. 배의 커다란 돛과 무거운 돛대 등을 버렸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배의 무게를 많이 줄여야하므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뱃사람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기구들을 버려야만 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한 불신의 결과 많은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10).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음)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도 보이지 않아 어둡고 광풍은 계속 불어왔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바다의 풍랑은 잠잠 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늘에 끼인 짙은 구름은 낮의 해와 밤의 별빛을 완전히 차단하였으므로 배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절망적인 표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항로를 이탈한 배에게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해와 별마저 보이지 않아 언제 어디서 암초를 만나거나 모래톱에 걸려 파선될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살아 돌아갈 희망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선장과 선주 이하 선원들은 전문가로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나(18, 19)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천 후 속에서는 절망뿐이었습니다.

 

(희망을 심는 바울)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태풍 때문에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파도와 바람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배 속에서 지독한 멀미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배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절망과 허기 속에 있던 무리들 가운데 바울은 지난날 자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바울은 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는 자기 의로움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이제부터라도 자기 말을 따라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이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들추어 내는 까닭은 결코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자신의 옳은 판단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부터 자기가 하나님을 힘입어 판단하고 지시하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기를 바랐습니다.

드디어 바울은 절망에 처한 그들에게 희망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이들의 생명에는 손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풍랑이나 허기짐보다 오히려 삶의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불안을 제거시키기 위해 배는 잃게 되더라도 생명은 잃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계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23, 24).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은 그 즉시는 안심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징후들이 보인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27- 36)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살리심)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바울 곁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이야기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가 계시해준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자의 헬라어 앙겔로스는 천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공동번역). 배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교도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도 알아들을 수있는 천사의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해주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8:9, 1022:17-21 23:11).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동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임을 분명히 밝혀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가이사에게 가게 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바울을 살리실 것입니다.

본래부터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23:11).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끝까지 관철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물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에게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하지 않고 가이사 앞에서 서야 한다고 말한 것은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오직 복음 선포로 인하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서 배에 있는 사람들을 다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와 함께 한 이백 칠십 오 명의 생명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주셨다는 선물 곧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온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을 바울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아마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바울)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은 안심하라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바울의 말을 믿고 안심하였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울의 믿음은 매우 확고합니다. 바울의 이런 확실한 신앙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절망적인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 신앙의 독특함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었습니다. 바울은 재판을 받으러 끌려가는 죄인 이상의 어떤 고상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한 섬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장래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배가 어느 한 섬에 걸릴 것이고 그러면 배는 잃게 될 것이나 사람들의 생명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22). 앞으로 일어날 결과는 바울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성을 사실로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바울을 보호하셨고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배에 있는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인의 사명이 남아 있을 때는 죽이지 않습니다. 생명을 보호해주십니다.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다 살려주십니다. 주님 나에게도 천안 캠퍼스 개척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또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나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건 사고에서도 구원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나에게 성경 66권 강해서를 쓴 후 오천 선교사 파송과 백개 지부 개척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경 66권 유튜브 강해를 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도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물깊이가 점점 얕아짐)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겨가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열나흘 째 되어서 배는 어느 섬에 가까이 왔습니다. 바울 일행을 태운 배는 미항에서 멜리데 섬까지 약 800Km 이르는 거리를 14일간 유라굴로라는 태풍에 떠밀려 온 것입니다. 그들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겼습니다.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의 바다를 이렇게 부릅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그레비 섬, 헬라 사이의 바다를 가리켰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자신이 탄 배가 팔레스틴에서 로마로 항해하다가 아드리아해 한 가운데서 난파당했던 일을 기록에 남겨놓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수일간 계속되는 태풍 때문에 11-3월 사이에는 항해가 중단됩니다.

사공들은 배가 육지에 가까이 오는 줄을 짐작하였습니다. 밤이었으므로 눈으로 보고는 알 수 없었습니다. 배가 동쪽에서 성() 바울(St. Paul)만으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쿠라 곶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지날 때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듣고 육지에 가까이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쿠라 곶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배에 탄 사람들이 들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삶에의 희망을 보여주는 기쁨의 소리로 들었을 것이고 그를 통해 바울의 예언이 사실로 다가옴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2). 사공들은 물의 깊이를 재니 열 다섯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의 길은 뻗치다를 뜻하는 데서 온 말로 양 팔을 벌려서 쭉 폈을 때 한손의 중지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중지 끝까지의 길이를 나타냅니다. 이 길이는 대략 1.8m로 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이십 길은 수심이 36m였다는 뜻이고 다음에 잰 열다섯 길은 수심이 27m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수심이 빠른 속도로 얕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암초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짐을 나타냅니다.

 

(고물로 닻을 내리고 날새기를 기다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니라

 

그들은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였습니다. 닻은 배를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밧줄이나 쇠줄에 매어 물에 던지는, 쇠나 나무 따위로 만든 무거운 물건입니다. 고물은 배의 뒷꼬리 부분을 가리킵니다. 닻을 배의 뒷부분 즉 고물에서 내리는 것은 보통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닻은 이물 즉 배의 앞머리 부분에서 내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배가 해변 가까이 접근해 있고 폭풍이 몹시 불어대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이물에서 닻을 내려 배의 앞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바람과 파도가 배를 해변쪽으로 밀어 붙이면 배의 뒷부분이 180도 앞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그 과정에서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닻을 고물에서 내린 것은 현명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닻을 네 개나 내린 것은 가능한 한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고정시키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도망가는 사공들을 막은 바울)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사공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러 놓고 도망가고자 하였습니다. 닻을 내려 배의 전진을 억제시킨 지금의 상황에서 밤만 무사히 지낸다면 날이 샌 후에 육지에 상륙 할 수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22-15). 그러나 선원들이 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염려와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여 자기들끼리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물에서 닻을 내리려는 체하며 거룻배를 내려 타고가려고 했습니다.

 

(사공을 잡으라는 바울의 방향)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바울은 이를 군인들에게 알리자 군인들은 거룻배를 끊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상황을 관찰하다가 정확히 파악했고 분병한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물에서 닻을 내리지 않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닻을 내리려는 선원들의 행동은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었으며 바울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그들의 도망을 저지시키도록 충고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원들이 없어져 버린다면 배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상륙할 때에도 경험이 많고 노련한 선원들은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사공들의 도주를 저지 시키라고만 했을 뿐 거룻배를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림으로써 거룻배는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이것이 백부장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면,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룻배는 다음날 육지에 상륙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들은 다음날 배를 해안에 갖다 대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고 그것은 실패로 돌아갑니다(39 -41).

 

(음식을 먹고 힘을 내라는 바울)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배에 있는 사람들은 열 나흘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무렵 바울은 우선 배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겠지만 곧 날이 새면 상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비상 사태에(43, 44)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열나흘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주렸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먹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열 나흘을 주렸다는 것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기간을 지내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먹지 않고 14일을 폭풍에 시달려 왔다면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만 섭취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먹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먹는 것은 단지 주림을 해소하거나 기운을 차리게 하는 차원을 넘어 생명의 보존과 관계됩니다. 11:7에도 구원을 생명의 연장으로 쓰인 용법이 발견됩니다. 바울이 날이 밝은 후 상륙을 시도할 때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견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결과론적으로 지금 음식을 먹는 것은 다음날 육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43, 44).

바울은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까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구는 구약 시대부터 전해져 왔던 격언 형식의 문구로(삼상 14:45 왕상 1: 52),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 핍박받는 자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12:7), 바울이 다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자신 있는 안전 보장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276명이 떡을 먹음)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떡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 없이 누구나 알고 있었던 식사 때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시 유대교 뿐만 아니라, 모든 헬라 세계에 일반적으로 식사에 대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바울이 축사를 하였을 때는, 명백하게 바울의 방식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의 내용이 말하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말을 듣고 다 안심하고 떡을 받아 먹었습니다. 바울의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도 담대하고 평안해 보였으므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식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 하였고 절망에서 벗어나 안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22, 25). 바울은 그들이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숫자를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음식을 먹은 후에 상륙할 것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인원 점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어본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요세푸스가 타고 가다가 난파 당했던 배에는 600명 가량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276명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해안을 향하여 들어감)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39.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그들은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배부르게 먹어 기운을 차린 뒤에는 밀을 바다에 던져 버려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이전에 버린 것은 곡물을 제외한 일반 화물이었습니다. 지금 버린 것이 바로 운송하던 곡물 전부였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소중한 곡물까지도 버려야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해변 가까이에 접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거룻배도 버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헤엄을 치거나 물에 뜨는 물체에 의지해서 상륙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예언이 점점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22).

날이 새자 어느 항만인지는 모르나 항만이 눈에 띄어서 그곳에 배를 댈 수 있는가 의논하였습니다. 28:11에 의하면 이 섬은 결코 선원들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배가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의 주항(主港)인 발레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멜리데 섬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후에 이 배가 들어간 이곳을 성 바울 만(St. Pauls Bay)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사진 해안은 평평한 모래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바울이 탄 배는 정식으로 된 항구에 배를 댄 것이 아니라 평평한 모래밭에 비상 상륙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고 키를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갔습니다. 평평한 모래밭에 배를 들이대고 상륙을 시도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이제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일단 배를 고정시켰던 닻을 끊어 버렸습니다. 닻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끊어버린 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여 해안 가까이에 상륙시키려는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닻을 버린 것은 더 이상의 항해를 포기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미 앞에서는 수하물(18), 배의 기구들(19), 곡물(38)을 버렸고 마침내 여기에서는 닻을 버림으로써 사람을 제외한 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22). 닻을 끊어 버린 후에는 고정시켜 두었던 키의 밧줄을 풀어 느슨하게 했는데 이는 배가 진행할 때 방향을 조절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다음에는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여 해안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앞에서 큰 돛을 버렸으므로. 여기서 사용한 돛은 작은 앞 돛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배의 고물이 깨어짐)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자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었습니다. 배의 고물이 큰 물결에 깨어졌습니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은 육지로부터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는 지형적인 영향으로 모래나 진흙과 같은 점토가 마치 사주(砂洲)와 같은 형태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물이 깨어졌다는 묘사는 배의 앞 부분이 바로 이 점토층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뒷부분은 부딪힐 때의 충격과 뒤에서 때려대는 파도에 의해 깨어져가기 시작했음을 말해줍니다.

 

(죄수들을 살린 백부장)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43a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군인들은 죄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보통 죄수들은 쇠사슬로 묶어두는 것이 상례였고 그럴 경우 헤엄쳐 도망갈 염려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의하면 죄수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봐 걱정했던 것입니다. 아마 곡물을 나를 때 쇠사슬을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군인들은 죄수들을 안전하게 이송해야할 책임이 있었고. 만일 죄수를 놓치거나 잃을 경우 죄수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12:18,19 16:25-18), 죄수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하여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약 백부장이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죄수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면 바울 역시 죄인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3)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 부하들의 뜻을 막았습니다. 바울의 말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을 보고 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경외하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나머지 죄수들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상황이었으므로, 바울로 인해 다른 죄수들도 죽음을 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사실상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바울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24).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 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뛰어난 용기와 그가 믿고 있는 신앙의 능력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로 인하여 죄수들도 살게 되었습니다.

 

(276명 모두가 구조 받음)

 

"43b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헤엄치는 사람들이 먼저 육지에 가게 하고 남어지는 널조각을 의지하여 육지에 올라가서 모두가 살게 되었습니다. 배가 좌초한 곳은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므로 백부장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을 먼저 뛰어내리게 하여 육지에 헤엄쳐가도록 했습니다. 나머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물에 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뭍으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울의 말대로 배에 타고 있던 276명의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구원을 받았고 그밖의 모든 것은 바다에 버려졌습니다(22).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입니다.

 

결국 바울 한 사람으로 배에 있는 276명이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명을 갖고 사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통하여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리더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방향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리더는 자신을 인해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행전 27장 강해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사도행전 271-사도행전 2744

요절 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사도행전 27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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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도행전] 사도행전 26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두번째 간증 메시지 오요한 2009-01-30
31 [사도행전] 사도행전 25장 강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오요한 2009-01-28
30 [사도행전] 사도행전 24장 강해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오요한 2009-01-28
29 [사도행전] 사도행전 23장 강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오요한 2009-01-27
28 [사도행전]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오요한 2009-01-25
27 [사도행전] 사도행전 21장 강해 복음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오요한 2009-01-23
26 [사도행전] 사도행전 20장 강해 바울의 고별설교 오요한 2009-01-20
25 [사도행전] 사도행전 19장 강해 에베소 교회의 제자양성 오요한 200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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