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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26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두번째 간증 메시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30 00:00:00
조회수 : 3,901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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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강해 일부 바울의 두번째 간증 메시지

사도행전 261-사도행전 2623

요절 사도행전 26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바울은 지금까지 예루살렘 사람들과 공회와 벨릭스 총독에게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전에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자신의 간증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 차로 간증메시지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회심 경험과 첫 번째 간증메시지와 비슷합니다. 다만 청자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과 높은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면에서 다릅니다. 장소도 안토니오영내가 아니라 가이샤라 총독부 관저라는 면이 다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거)

 

“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과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25:23) 아그립바왕은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청문회가 아그립바를 위하여 열린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25:22) 바울에 대한 청문회의 주도권은 아그립바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베스도가 자신은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므로 바울에 대한 심문을 아그립바에게 일임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풍속을 이해하는 아그립바 왕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손을 들어서 유대인들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왕에게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생각한다고 합니다. 바울의 항소가 받아들여진 이상 재판은 끝난 것이며 바울이 다시 변증을 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 기회를 자신의 무죄됨을 주장기보다는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를 때 왕과 총독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연설을 시작하면서 손을 들어 예의를 표시하였습니다. 가이사랴의 최고 권력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이 위엄 있게 앉아있는 자리 앞에 사슬에 묶인 채(29) 손을 들어 연설을 시작하는 바울의 모습은 비장합니다.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24:10).

 

(유대인의 풍속을 아는 아그립바왕)

 

“3.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바울은 특히 아그립바 전하께서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모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하기 좋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제 말을 끝까지 참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고 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아그리립바 왕에게 변호하는 것을 다행스럽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주신 사명대로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아그립바는 유대의 종교적인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설명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베스도가 선뜻 판결을 내리지 못한 데에는 유대의 종교적 배경에 대한 무지가 작용하였으므로 바울의 심정은 답답했을 것입니다. 베스도가 이미 그에게 정치적인 죄를 판결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25:25), 바울은 더 이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에게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변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아그립바왕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젊은 시절)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바울은 먼저 자신의 회심과정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젊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생활 방식(manner of Life, KJV)을 다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으나 실질적인 그의 정신적 배경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22:3). 바울이 어려서 바리새적 배경을 가지고 유대교적 열정이 매우 강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하여 엄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신앙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경건한 종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 종교를 우리 종교로 표현하여 아그립바와 자신의 동족성을 확인하며, 공감대를 넓히고 있습니다. 4절의 다 아는 바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또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유대교를 우리 종교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한때 유대교적인 정통성에 누구 못지않게 철저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습니다(1:13, 14 3:5, 6). 실제로 바울은 힐렐 학파의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라 하면 가장 엄격하고 완벽에 가까운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심문 받음)

 

“6.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바울은 과거에 대한 언급을 간단하게 끝내고 심문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주목하게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메시야와 부활이 핵심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언약들과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어 갈 것입니다.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성취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메시야가 오면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죄와 죽음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아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의 소망입니다. 바울이 심문 받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상으로부터 간절히 바라오던 메시야의 소망 때문입니다. 바로 이 소망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두신 소망 때문에 심문을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하리라 비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와 세계선교의 소망 가운데 인도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유대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은 전체 이스라엘이 간절히 바라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소망을 인하여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유대인에게 송사를 받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바울 이 소망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할 때 소망이라는 말은 바울의 변호 연설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핵심적인 용어입니다(23:624:1528:20).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계에 전파하는 세계선교의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으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고난 받을 때 소망에 관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합니다.

 

(부활 소망을 가짐)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은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 못 빋을 것으로 여기느냐 묻습니다. 바울 소망의 핵심은 죽은 자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를 부활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상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번영신학, 성공신학, 기복신앙에 집착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를 우리의 마음 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여기서 당신들은 대다수의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자리에는 아그립바왕 버니게 외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이 질문은 그 특유의 치밀하고 예리한 논증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부활을 배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질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이라고 하는 일반론적 차원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긍정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믿음을 유도하는 질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도록 돕고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바울도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많은 일을 행해야할 줄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나도는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오히려 적대했던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도 극적인 변화를 받았듯이 반대자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바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탄압자에서 선포자로 바뀌는 극적인 반전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22:3, 4딤전 1:13). 바울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원만하고 점진적인 신앙을 키워가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바울의 경우에는 극적인 전환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강한 설득력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를 대적하는 일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야 될 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대적하는 일을 하는 필요성이나 의무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했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투철한 종교적 의무감이 작용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권세를 받아서 예수님 믿는 자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스데판을 죽일 때는 옳다고 투표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가편 투표를 하였고를 직역하면 자갈(검은색)을 아래로 던졌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고대에 재판할 때 배심원들이 피고가 무죄라고 판단될 때는 흰 자갈을, 유죄라고 판단될 경우에는 검은 자갈을 던졌던 판결 방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재판할 때 사형에 처하는 판결에 투표를 하였다는 진술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찬성 투표하였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아 찬동하다의 뜻으로 이해합니다.

 

(외국까지 가서 박해함)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바울은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그리스도인을 형벌하였습니다. 모든 회당은 예루살렘 내에 있는 회당들을 가리킵니다. 당시에 회당에서는 형벌로 채찍질하였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하여 성도들을 배교자가 되게 유도하였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일은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찬은 더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어떤 특정한 집단을 탄압함에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신조나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방법입니다. 고대 수리아의 폭군 안티오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트라얀에게 보내는 젊은 플리니의 보고서에는, 만약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그를 놓아 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대제사장에게 권한을 위임 받아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할 때 유대지역 밖으로 나간 것으로 언급된 곳은 다베섹 뿐이었습니다(9:222:5). 외국성은 다메섹으로서 출장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유대교의 세계선교를 하였습니다. 핍박하였다는 사냥감을 쫓다 적을 쫓다의 뜻을 가진 디오코의 미완료형으로, 반복되는 핍박 시도를 뜻합니다. 바울이 사냥감을 쫓는 자나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뒤쫓는 자와 같이 박해하였습니다. 열심으로 말하면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유대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위임 받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바울은 자기 생애에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던 결정적 순간을 다시 언급합니다. 이 진술은 사도행전 91-19와 사도행전 226-21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합니다. 주된 이야기의 흐름은 동일하나 세부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하는 당시의 상황이나 청취자에 따라 강조점을 다소 변화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2 사도행전 225에는 사울이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로부터 권세와 위임을 받은 것으로 표현됩니다. 본절의 표현이 더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큰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바울이 길을 가고 있을 정오 때였습니다. 전에와 달리 정확한 시간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의 정오는 매우 무덥기 때문에 대개 이때쯤이면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을 위해 강행군을 할 정도로 열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때가 한 낮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체험이 온전한 정신을 가진 상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강렬한 빛에 의해 자신의 눈이 멀게 되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으며, 모든 관심은 주님이 하신 일과 주님의 말씀에로 집중하여 말합니다.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동행들은 다 땅에 엎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육신의 몸으로 승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면 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면 큰 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의 보내신 사람들을 통하여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바울)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예수님은 히브리말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람어로 말씀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21:40). 주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사울이라는 아람어로 불렀습니다(9:422:7). 사도핸전 91에는 사울로스라는 헬라어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냐 네가 가치채를 뒷발질 하기에 고생이라는 말씀이 들려 왔습니다. 이 말은 헬라와 라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본래적 의미는 신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말은 농경 문화에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가시채는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킵니다. 이 가시채는 밭을 갈 때 소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 속담은 유대교 내에서도 알려져 있었으며 양심의 고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 스스로 양심과 싸우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적 열정으로써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지만 날이 갈수록, 특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점차 혼란과 번민에 빠져들었습니다. 가시채찍을 뒷발질하며 피를 질질 흘리는 바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연민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그 정해진 섭리를 거역했던 바울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리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증인 삼으신 예수님)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바울에게 찾아오신 분은 바울이 박해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여 하늘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 발로 서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에 대한 이야기가 생략되고 대신 아나니아를 통해 받은 소명을 바울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이 소명의 인식을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 받았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건 그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상황에 맞추어 요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부수적인 것들은 언급하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아나니아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을 상대로 말할 때는 자신의 유대교적 경건성과 정통성을 증거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금과 같이 헬라적 청중들까지 포함된 상황에서 변증할 때는 유대교적 경건과 정통성을 그렇게 중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불가항력적인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어떻게 이끌림을 당했는가를 증언합니다.

네 발로 서라는 말씀은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소명을 상기시킵니다(2:1, 31:7, 8). 바울의 소명 내용도(18) 이사야 425-7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의 소명과 유사한 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타난 것을 바울로 증인삼기 위해서 나타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부르신 것은 그를 일꾼으로 삼아 보고 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려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를 본 일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경험한 것을 가리킵니다. 장차 나타날 일은, 앞으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보여질 것(16:9, 1018:922:17, 1823:1127:23고후 12:1-4, 7)을 가리킵니다. 바울을 통하여 소아시아와 유럽과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려움과 외경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주께 받은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도록 명령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은 바울을 구원하여 이스라엘과 이빙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구원하여는 선택하여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7:10, 3423:27) 이 단어가 구원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사례가 있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과거 여러 차례의 위기 상황에서 구원함을 받았었습니다(9:23-2521:30-3223:12-2425:3).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이 본문은 이사야 426, 7에 이방의 빛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빛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종이(42:6) 어두움에서 헤매이고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빛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듯이 바울도 사람들의 소경된 영안을 뜨게 하여 죄악과 방탕한 어두움의 생활에서(1:245:18) 빛을 발견케 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8:12요일 1:5).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조금도 어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와 절망과 죽음의 어둠을 몰아내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또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사단의 권세를 뜻한다면 빛은 하나님의 지배를 뜻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13에서는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흑암의 세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으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는 죄사함을 받고 그의 자녀로서 기업을 얻게 됩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모두 어둠의 권세에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방인 전도를 함)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그 후부터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대사람과 이방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자의적인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0:9).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13-18), 그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명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의 본 바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논리로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청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삶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의 삶의 일관된 내용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9:19-243:9-11),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고전 15:43), 자신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딤전1:15)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 이방인이라고 말하여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 끝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전파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먼저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9:19), 다음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9:28, 29)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회개의 촉구는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촉구하였고(3:2), 예수님도 그랬으며(4:17),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회개를 선포했습니다(3:19).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행실을 중지하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18) 옮겨가는 것으로 복음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38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이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5:22, 23).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와 구원은 그 열매로써 증거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함)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지만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바울을 지금 심문받는 자리에 서게 한 직접적인 죄목은 소위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21:26-28). 그런데 바울은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일과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했던 일을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핵심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추측에 의한 정죄는(21:29 주석참조) 하나의 계기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던 궁극적 이유는 그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22:21, 22).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을 잘 알고 있던 아그립바는 바울의 소명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21:31, 3223:12-15).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으며 17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항상 증언한 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인류의 빛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말씀에 기초한 증거)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바울은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선지자들이 반드시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앞에서는 복음이 민족의 차별을 뛰어넘어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17, 20), 여기서는 복음이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전파되는 것임을 밝힙니다.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혜택을 줍니다(3:16). 선지자와 모세는 율법과 선지자(13:15)와 같은 뜻의 표현으로 구약 전체를 요약한 말입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전파한 복음이 모세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일치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1:216:26).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우선 전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신다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기독교는 예수께 적용하여 예수의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메시야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영웅적 존재로서 옛 유다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할 지상적.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8:27-38 10:35-45) 메시야가 이방 세계를 포함한 만방의 빛이 되시리라는 예언은 이사야서에 나옵니다.(421-7 496, 603)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메시야가 고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서는 메시야가 죽었다가 첫번째로 부활하리라는 생각 역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메시야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는 유대 민족은 물론이고 모든 민족에게 빛을 선전하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큰 빛으로 계십니다. 선전하시리라는 공포하다, 선언하다, 전도하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빛을 선포한다 함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이요(1:17요일 1:5), 어두움이 아니라 밝음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포한다는 말입니다(18). 예수님은 큰 빛이십니다. 예수님 빛이 비치면 어떤 어둠도 물러갑니다. 바울의 무지함도 예수님의 빛으로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나의 내면에 있는 절망 무의미 허무함도 물러갔습니다.

사도행전 26장 강해 일부 바울의 두번째 간증 메시지

사도행전 261-사도행전 2623

요절 사도행전 26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사도행전 26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사도행전 26장 강해 이부 결박된 것 외에는 나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씀 사도행전 2624-사도행전 2632

요절 사도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증거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많은 공부를 하다가 미쳤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왕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뿐 아니라 왕에게 복음을 믿는 죄인인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높은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을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신비한 체험으로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문외한인 베스도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 바울을 볼 때 순간적으로 그가 미친 것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바울의 말을 베스도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은 이 부문에서 사실상 끝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조현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듯이 영적인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의 생각에는 바울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토록 몰두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적 차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끔 자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렇듯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만 주된 관심이 있는 베스도의 모습은 복음의 신령한 메시지를 영접한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대조를 이룹니다(13:7, 12). 베스도는 바울이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해서 미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폭넓은 지식과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는 달변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그밖에는 희랍의 철학이나 당시의 최고 학문에 대해 폭넓은 지식이 바울을 미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베스도가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렸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과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은 바울로 하여금 미친 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소리를 듣는 것에 개의치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자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고후 5:13). 주님께서도 살아 생전에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10:20).

 

(온전한 말을 하는 바울)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바울은 이런 아그립바왕에게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미친 자가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은 건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을 뜻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바울의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심한 말로 맞섰던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 다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이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보고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적인 종교입니다. 신비적인 것을 이성화할 수 없으면 그것은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신비적인 것을 이성화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함을 알고 더 이상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했습니다. 바울은 결코 비굴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담대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대히 말하노니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함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바울은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않고 진실대로 말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을 가진 성전의 보호자였고, 유대교와 구약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바울의 증언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증언이 어떤 은밀한 종교 집단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진 생생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공공연하게 선포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삶이 공개적인 것이었고(22:53). 그분의 죽음 또한 여러 증인들에 의해 목도 되었고(23:26, 35-37). 예수의 부활 역시 빈 무덤이라는 객관적 증거와 현현 체험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28:9-1116:12, 14), 그처럼 제자들의 복음 선포도 공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201:82:1416:20).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선지자를 믿느냐고 묻습니다. 선지자를 믿으시냐는 말 속에는 선지자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부활 또한 당연히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가면 누구나 선지자를 믿습니다. 아그립바는 성전의 보호자로서 선지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피상적 지식차원에 불과하였으므로 예언된 바 메시야에 관련된 구절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합니다. 복음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실한 것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복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변명의 기회를 예수님 증거의 기회로, 자기 구원의 기회를 타인 구원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세상 권세에 기죽지 않고 담대히 예수님의 이름을 외친 참된 복음의 증인이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단 한번에 자신을 설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적은 말로 나를 권한다고 말합니다. 적은은 전치사 엔과 함께 쓰일 때는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적은 말은 RSV처럼 짧은 시간 안에(in a short time)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아그립바왕은 바울의 말에 크게 동조도 않고 반대도 않는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왕도 바울처럼 되기를 바람)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은 말이 많고 적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박된 것 외에는 자신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이 적으나 많으나는 길거나 짧거나(whether long or short)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의 대답이 부정이건 긍정이건 간에, 그리스도인이자 복음 증거자로서의 자산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과 아울러 애정 어린 소망을 기원합니다. 바울은 죄수였지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게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18). 바울의 마지막 말과 행동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는 가이사랴 최고의 권세가들 앞에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더구나 그의 손에는 사슬이 매여 있습니다. 그런 모습의 바울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권세가들에게 자신에 찬 목소리로 진정한 영적 자유에로의 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왕은 몸은 자유인이나 마음에는 슬픔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자유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사슬 묶인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맺을 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아마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는 그리스도를 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에 대해서도 긍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왕 앞에서도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자긍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바울은 현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죽은 후에 있을 하나님 나라와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아그립바왕은 비록 왕이지만 사단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죄수라도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마음에는 성령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의가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부활하여 왕노릇할 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선언함)

 

“30.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일어나서 공통적으로 바울이 무죄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배석했던 사람들이 일어섬으로써 그날의 청문회는 조용히 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바울을 비난하거나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문소를 빠져나간 참소자들은 다른 장소로 옮겨가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무죄는 천부장 루시아(23:29), 벨릭스(25:25)에 이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석방할 수 없음)

 

“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을 석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다면 석방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그립바의 결론입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바울의 무죄를 최종적으로 조언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그밖에도 베스도가 항소 이유서를 작성할 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무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않는 것에 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지 못하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가야되는 현재 상황의 배후에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사도행전 2311). 바울의 석방되지 못함은 도리어 그에게 가장 안전한 로마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

 

바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해보다 밝은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분을 직접 만나면 다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주의 종을 통하여 이분을 만나고 말씀을 통하여 이분을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은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결박당할지라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이나 총독이나 대제사장 앞이라도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여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를 통해 세상 권세자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지만, 이는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10:18). 하나님은 세상 권세자들도 불쌍히 여기시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복음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보편적인 구원의 소식입니다.

사도행전 26장 강해 이부 결박된 것 외에는 나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씀 사도행전 2624-사도행전 2632

요절 사도행전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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