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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20장 강해 바울의 고별설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20 00:00:00
조회수 : 8,257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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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강해 헬라와 드로아에서

사도행전 201-사도행전 2016

요절 사도행전 2033a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오늘 말씀은 바울의 삼차 전도 여행의 후반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삼차 전도여행을 하고 다시 이차 전도 여행지를 다니며 제자를 굳게 합니다. 이때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일을 합니다. 드로아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고 말씀을 밤새 전합니다.

 

(에베소 교회를 마게도냐로 간 바울)

 

1절을 보십시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쳤습니다. 데메드리오 사건(19:23 이하)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이 그쳤습니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하나입니다. 이제 소동이 진정되자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것이 그 자신의 안전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바울은 소요가 그친 그 시간에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이차 전도 여행을 하였던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격려하고 권면하며 또한 위로하였습니다. 바울은 권함이 끝난 후 서로 포옹하고 사랑의 입맞춤을 나누며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의 작별에 대한 일반적인 관습은 서로 안고 입맞추는 것입니다(37).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여정)

 

2절을 보십시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19장의 폭동이 있은 직후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19:21) 마게도냐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로아로 항해하는 연안 무역선을 탔을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고린도 교회의 심상치 않은 사태에 대한 소식을 알고자 파견했던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나 보고를 들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도를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드로아에서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활짝 열려 있었는데도(고린도후서 212, 13)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여러 생각들 때문에 곧장 고린도로 향하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마게도냐를 들렸습니다. 마게도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가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다니며 제자들을 권하고 헬라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행도로 가는 것을 그 지방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차 전도여행을 한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재방문하고, 로마서 1519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루리곤까지도 갔을 것입니다. 또한 이때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Egnatian Road)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하여 그 길의 끝인 아르리아 해의 두로하키움에까지 여행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마게도냐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도 이때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고린도후서 76).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에 접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교회를 훈계하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교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직접 고린도를 방문하였고(고후2:1) 다시 디도 편에 서신을 보내 교회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고후2:3-4 9:6). 그후 자신을 찾아온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교훈을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들은 바울은 다시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감사하면서 아직도 사람들을 충동하는 거짓 교사와 이들의 선동에 경거망동하는 일부 성도들을 강하게 질책하고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합니다. 특히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의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내면 세계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자서전적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여행의 주 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한 신자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습니다(15:25-32고전 16:1-4). 이방인 교회들의 연보는 단순히 사랑을 나타내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헬라에서 삼개월)

 

3a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바울이 헬라의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곳은 헬라, 즉 아가야 지방이었지만 실제로 바울이 체류하였던 곳은 아가야의 수도 고린도였습니다. 체류 기간은 삼 개월로 A.D. 56-57년에 걸친 겨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따뜻한 대접을 받으면서(로마서 1623) 이 기간에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서신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그의 방문에 대한 준비도 시키고 또한 체계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장차 로마를 세계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하려고 로마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로마서 1517-23). 그는 로마를 통하여 세계를 복음화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생명의 위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언적인 서신인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서와 같습니다. 어떤 특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삼 개월은 소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소비가 아닙니다. 그가 수천 명의 사람을 전도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로마서 기록이 역사를 변화시키고 수만의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루터와 캘빈을 변화시키고 어거스틴을 변화시켰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쉼을 주실 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쉬는 이 시간에 더 큰 일을 하십니다.

 

(바울의 수행원들)

 

3b,4절을 보십시오.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바울은 이곳에서 수리아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바울을 해하려 하므로 수리아로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꾸어서 마게도냐를 거쳐서 돌아서 예루살렘에 가려고 작정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기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고 헬라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바울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원하는 사람들이 타고 가는 순례선을 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8:18).

그런데 바울을 박해해 오던 유대인들이 그가 배에 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또는 배 밖으로 밀쳐 버림으로써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득불 노정을 변경하였습니다. 바울은 해상보다 훨씬 늦은 마게도냐를 거쳐 육로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결정하였습니다.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일곱 사람은 지난 2년 동 안 이방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궁핍한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보롤 드렸던 것을 맡아 가지고 가는 사명을 받은 각 교회의 대표자들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이 연보를 관리하지 않고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맡겼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결정대로 매우 지혜롭게 행동하였습니다.(6:1-6). 소바더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로서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합니다. 아리스다고는 1929의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바울을 따라 갔으며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하는 데살로니가 출신입니다(272 골로새 410 빌레몬 24). 세군도는 마게도냐 교회를 대표한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단지 여기만 나오는 인물입니다. 가이오는 더베 출신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대표합니다(19:29). 디모데는 루스드라 출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16:1-3).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며 언제나 바울과 동행한 인물로서 골로새와 에베소 교회에 바울의 서신을 전달합니다(6:214:7딤후 4:123:12).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으로 아시아 교회를 대표합니다(딤후 4:20).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86 이하로 미루어보건대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디도와 다른 형제에게 맡겨져 보냈을 것입니다. 누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디도와 함께 파견된 두 형제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 사도는 그의 활동의 절정기에서 여러 수행인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합니다.

 

(드로아에서 누가가 합류함)

 

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바울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앞절에 언급된 일곱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나 네압볼리를 경유하여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먼저 갔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지 않으나 바울은 누가와 합류해서 빌립보에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일곱 사람보다 늦게 드로아로 가기로 여정을 짰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가 들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16:10). 바울 일행은 무교절 후에 배를 타고 닷세만에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다른 일행을 만났습니다.

 

(안식후 첫날의 모임)

 

7a절을 보십시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누가는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합니다. 주일날 일행은 성찬을 위해서 모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날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주일날 모인 것이 최초의 언급됩니다.(20:19, 26고전 16:21:10).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 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습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합니다(10:25).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안식후 첫날 모여 떡을 떼었습니다. 그들이 안식 후 첫날에 모인 목적이 떡을 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주의 거룩한 만찬을 기념하였습니다..(고전 10:16, 1811:17-34)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개인집에 모여서 단순한 식사를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녁 시간이 아니고 한밤 중에 떡을 뗀 것을 생각해 보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모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모임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습니다. 매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이었습니다. 떡을 떼는 일은 반드시 말씀을 강론한 후에 실시되었습니다.(207-11) 바울은 이튿날 떠나기 때문에 밤중까지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습니다.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하였습니다.

 

(밤중까지 계속 강론하는 바울)

 

7b,8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그들이 모인 윗다락에는 등불을 많이 켰습니다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에서 모였습니다.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이지만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곳은 등불을 환히 켰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모임에 어두움 속에서의 제의적 매음 행위가 있다고 의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임의 분위기를 밝게 하여 말씀을 가르치기 편하게 하였습니다.

 

(유두고의 죽음)

 

9절을 보십시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유두고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습니다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에 걸터 앉았습니다. 그는 졸다가 바울의 강론이 더 오래 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철에서 떨어졌습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드러냈습니다.

유두고는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는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졌습니다.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또한 많은 등불들로 인해 방안이 더워졌고 타오르는 기름에서 검은 연기가 나와 공기를 흐리게 하여 산소부족 현상을 일으키므로 졸음이 가중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그는 죽었습니다. 의사인 누가가 전문적인 관찰을 통하여 죽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살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바울은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서 살렸습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뛰어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그 위에 엎드려 완전히 껴안고, 함께 둥그렇게 붙잡았습니다. 엘리야와(왕상 17:21)와 엘리사(왕하 4:34, 35)의 경우와 같습니다. 바울은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불고하였는데 바울은 떠들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흐느끼고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5:38ff.) 떠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를 끌어 안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습니다. 바울은 생명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열정)

 

11,12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바울은 다시 올라와서 새벽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떠났습니다.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데 열정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죽은 청년을 살리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으로 적지 않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 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습니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유두고가 떨어지기 전에도 밤새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유두고를 살린 후에도 계속 밤새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 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28:18-20)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된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성도의 위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육로와 해로를 거쳐서 밀레도로)

 

13-1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은 걸어서 앗소로 가고 나머지 일행은 배를 타고 앗소로 갔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정하여 주었습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약 32km나 되는 거리인데 밤새 철야 강론을 한 바울이 일행을 먼저 보내고 왜 혼자서 육로로 가는 길을 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육로를 도보로 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예상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요?

그때는 4월의 아름다운 화창한 봄이었다고 합니다. 불쑥 돌출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서 긴 항해를 하는 것보다 직선거리인 육로를 통해 가는 것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깊은 묵상하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한 발자국씩 예루살렘으로 다가서는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행은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갔습니다. 그 배는 앗소로부터 70km 정도 떨어진 레스보스섬의 수도 미둘레네로 향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나타냅니다. 이튿날 기오에 이르고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을 태운 배는 첫 날 밤에는 미둘레네에서 보냈습니다. 둘째 날 밤에는 가능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 때문에 항구에 배를 정박시키지 않은 채 이른 아침의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기오 앞에 있었습니다. 셋째 날에는 사모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베자 사본은 그들이 밤에 사모에 인접한 항구인 트로길리움에 체류한 것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 에베소 곁에 있는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고자 함)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자 서둘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그냥 지나가기로 한 이유를 밝힙니다. 에베소를 지나서 배타고 오순절 안에 예루셀렘으로 가고자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전에 바울은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로 곧장 가는 계획을 포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능하다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가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한 연보를 전해 주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이 연보는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이방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칠 숭고한 메시지를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방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 교회가 서게 되었는가에 관한 선교 보고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강해 헬라와 드로아에서

사도행전 201-사도행전 2016

요절 사도행전 203a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사도행전 20장 강해 일부입니다.

 

 

 

사도행전 20장 강해 이부 밀레도의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17-사도행전 2038

요절 사도행전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에베소 근처인 밀레도에 다시 와서 자신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복음역사를 섬겼는지를 간증합니다. 바울이 목자 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회고하는 바울의 고백적인 설교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별설교를 통하여 참 목자상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를 청함)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장로들을 청하였습니다. 배가 밀레도 항구에 닿자마자 바울은 그곳에서 직선 거리로 약 50km 떨어진 에베소에 사자를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 관심과 사랑이 매우 컸습니다. 장로들과 감독자들은(28)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습니다.(5:14밸전 5:1-4). 바울은 이들에게 간증 메시지요, 고별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의 목자 바울)

 

18,19절을 보십시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장로들이 오자 바울은 에베소에 간 첫날부터 에베소 성도들을 어떻게 섬겼는지 간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일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찾아온 것은 바울의 사랑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어떻게 섬겼는지는 장로들도 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약 3년에 걸친(31) 에베소 사역을 하였습니다. 장로들도 아는 바라고 그들을 증인 삼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연설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한 자신의 실생활을 증거삼아 복음으로 살 것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에베소 교인을 섬겼다고 간증합니다. 겸손은 굽실굽실하는 굴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주님께 예속된 자로서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눈물이며’ 31절에서도 눈물이 다시 언급되며 또한 고린도후서 24과 빌립보서 318에서도 그의 눈물이 언급됩니다. 그가 고도의 지성인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입니다. 이 눈물은 주님을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그 아픔에 못이겨 나온 것입니다. 또한 자기 동족의 회심을 위한 그의 애타는 심정의 표현입니다. 시편 119136 말씀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가 바울의 마음을 잘 나타냅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장을 위한 눈물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이들을 섬기는데는 겸손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많은 시힘을 참고 주를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13:4514:217:5) 또한 당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19:9,13,33,34) 고린도후서 11장은 에베소에서의 유대인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종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현재 시제의 사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직 종으로서 주님만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

 

20,21절을 보십시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유익한 것은 공사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18:1919:8)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바울이 심방한 에베소 교인의 집이나 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18:26). 강단에서 선포적인 설교와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피고 권면하고 가르쳤습니다. 공적인 설교만 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일대일로도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추러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 전하였습니다. 그는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삭감이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증거의 책임을 다한 자신의 떳떳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바울이 증거한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습니다(2:383:19). 사람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각성과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과 멸망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합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의롭다 하시며 새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 그 자체는 개과천선에 머무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컨대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사시고 나를 위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결박과 환난 당할 것을 아는 바울)

 

22-23절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은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 일을 고난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령의 지시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내적인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결박과 환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주었습니다.(21:10-14).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실이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 바울)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실 앞에서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로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겠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오직 복음 전파를 하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의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습니다(14:81:20, 21).

그가 전한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행위의 복음, 율법의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살아가는 복음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알고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드리고자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결혼 전에 자살하고 하는 자입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인생을 덤으로 살았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남은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나의 모두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기도와 말씀 연구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목자들에게 힘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자 하시는데 우리가 성령의 일하심을 막고 있음을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남은 나의 삶을 온전히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온전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에게 목자의 심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2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1:4). 븍음은 죄사함의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주제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내 마음에 누리고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죽음을 이기게 합니다.

 

(파수꾼의 책임을 다한 바울)

 

26,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은 오늘 모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의 피에 대해서 무죄하였습니다. 바울이 증언한다는 이 말은 신약에서 바울만이 자주 쓴 표현으로 중대한 선언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5:3).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한 피는 생명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뜻은 20절의 반복으로 하나님의 뜻이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 곧 복음을 다 전하였으므로 그들의 생명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에스겔 331 이하의 말씀을 자신에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은 자가 경비를 소홀히 하여 백성에게 화가 임하면 그 피가 파수꾼에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33:1-7). 그러나 파수꾼의 간절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행을 거듭하면 그는 죄악 중에서 죽고 파수꾼의 생명은 보존되었습니다(33:8, 9). 바울은 복음을 맡은 자로서 자기의 책무를 남김없이 수행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목자가 하나님의 뜻을 다 정하지 않으면 목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졍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양들의 책임입니다.

 

(깨어있으라고 권면함)

 

28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17절에 나타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지금까지 그들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말한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수고를 당부합니다. 장로들은 성령께서 감독자로 삼은 자들입니다.

사도시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오늘날처럼 구별이 없었습니다. 장로, 목사, 감독등의 직무가 제도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이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감독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감독자들에게 엄숙한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행위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을 확증합니다. 장로들은 사역자의 포괄적인 목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장로들이 양 무리를 먹이고 인도하고 돌보았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비할 데 없는 고귀하고 그 교회의 양 무리를 맡은 자의 책임이 중차대함을 말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장로들에게 양들을 보살피는 그 임무가 위탁되었습니다. 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삼가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삼가야합니다. 계속의 의미를 내포한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근면하고 깨어 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를 위하여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야합니다.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소홀한 사람은 양떼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결코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철저해야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합니다. 목자가 깨어 양을 돌보듯이 그들은 양떼를 위해서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양들을 살피고 병든 양을 돌보아야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이리가 나타날 것을 예언함)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감독들이 깨어 있어야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와 같은 이단의 무리가 들어와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온다고 에베소 교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경고합니다. 이들이 유대주의자들인지 아니면 영지주의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거짓된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양의 탈을 쓰고 침투하는 이리들에 대해 경계하셨습니다. 교회가 배교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또한 리더들 중에도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외부로부터 침입해서 양떼를 해칠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사단이 역사합니다. 에베소 교회 자체에서도 교회를 파괴하는 세력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써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옵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는 자칭 사도라하는 자들이 들어왔고 니골라당이라는 이단이 생겨 분열을 획책하였습니다. 니골라당은 음란한 세력이요 영지주의자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목회 서신(딤후 1:152:17)과 계시록(2:1-7)에 나타나 있습니다. 장로는 이런 사단의 무리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삼가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물로 각사람을 훈계한 바울)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방심하지 말고 계속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하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35).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장로들이 정신을 차려서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깨어있는 목자로서 본을 보였습니다. 장로들은 바울이 이들에게 삼년 동안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기억하라는 모세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할 때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능력을 펴서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고 또한 이 광야에서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8:2, 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경외하라(8:1-6)고 모세가 촉구한 것과 같이 바울 자신이 삼년 동안의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주님을 섬기고 각 사람을 가르친 것을 기억하여 그 본을 받으라는 권면합니다. 바울은 겸손하고 인격적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언행 일치한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감화력 있는 교육 방법입니다. 바울은 눈물로 양들의 죄문제를 도왔습니다. 이리가 들어올 때 장로들은 바울을 본받아 눈물로 이들을 훈계해야합니다.

 

(말씀에 부탁하는 바울)

 

32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장로들을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였습니다.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일 뿐 근본적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습니까?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맡기는 삶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다스리는 그 방법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 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부탁하는 것은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장로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 중에 기업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 나라 가기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심어야합니다.

 

(물질 생활에 본을 보인 바울)

 

33-35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이들과 있을 때에 물질 문제에서 깨끗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자신의 자랑으로서가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탐욕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 , 의복은 고대의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왕하 5:22).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탐하지 않았고(고전 9:4-18 고후 11:7-1212:14-18살전 3:8, 9) 오직 자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로서의 그의 직무롤 마칠 때 온 이스라엘 앞에 물질 생활에 깨끗함을 고백한 말과 같습니다(삼상 12:3, 5). 바울은 항상 자신이 일하여 자신의 먹을 것을 자립하였습니다.

그는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물질로 도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살후 3:7-12)와 고린도(고전 9:11-15고후 11:7-12)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친히 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계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필요까지 채워주었습니다(18:3고전 4:12 살전 2:9). 그러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이 자비량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가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4). 다만 바울의 경우는 당시 반대자로부터 탐욕을 위해 일한다는 어떤 빌미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신도 목자를 고집하였습니다. 바울은 생계비를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고 손수 일했습니다. 바울이 한 일은 천막 깁는 일이며, 동행들이란 디모데, 에라스도, 누가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킵니다.

요즘에 많은 목회자가 물질 문제로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하여 목회자가 물질 생활에 투명하고 깨끗해야함을 배웁니다. 평신도도 목회자가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평신도 목자의 모범을 봅니다. 그는 주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복옴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 그 정신이 이미 나타났으며 또한 누가복음 638과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구전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이 초기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다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한 권면의 결론을 삼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들은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 합니다. 약한 자는 경제적인 면에서 빈궁한 자를 가리킵니다.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자를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428의 바울의 권고와도 일치합니다. 그는 자립할 뿐 아니라 주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목자는 겸손과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목자는 섬기는 생활을 살아야합니다.

 

(울며 헤어진 에베소 성도들)

 

36-38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이 말을 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경고하고 권고한 것의 최종적인 결론으로서 기도로 마감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으로써만 신령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알고 기도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하여 겸손히 무릎을 꿇은 바울의 태도는 하나님께 향한 간절함과 동시에 이별의 슬픈 감정을 나타냅니다. 일반적인 기도 자세로는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이었습니다(18:10, 13).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인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들은 작별에 대한 깊은 아쉬움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목을 안았다는 것은 요셉이 그 아우 베냐민과(45:14) 아버지 야곱에게(46:29) 했던 것과 같습니다. 점잖게 한번 나누는 거룩한 관례적인 입맞춤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격정에 차서 몇번이고 연거푸 입을 맞추는 것을 뜻합니다(15:20). 그들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인하여 더욱 근심하여 배에까지 바울을 전송하였습니다. 바울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로 인해 깊이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정박 기간이 끝나서 이제 밀레도를 출항하려는 배에까지 전송하는 장로들의 모습을 기술함으로써 누가는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목자와 양들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장에서 만남과 작별에 대한 내용과 그 광경이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기술된 것은 누가가 당시 바울과 함께 동행하면서 모든 현장을 목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깊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양들을 사랑한 목자 바울)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목자요 섬기는 목자 바울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주시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도 눈물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고 음식을 섬겨주셨습니다. 인간은 죄악됩니다. 자신이 잘못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고칠 줄을 모릅니다.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겸손과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눈물의 목회입니다. 나의 목자인 한안드레 구모세 서베드로 홍보나 전요한 목자님은 나를 깊이 이해하시고 지금까지 사랑과 겸손으로 섬겨주셨습니다. 저도 양들을 이런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말씀으로 양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이 부족합니다. 내 마음에는 양들로 인한 끊임없는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필요로 하는 좋은 목자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떠난다고 할 때 울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요? 내가 얼마나 이들을 사랑했나요? 내가 얼마나 양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나요?

사도행전 20장 강해 이부 밀레도의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17-사도행전 2038

요절 사도행전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행전 20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34 [사도행전] 사도행전 28장 강해 일이부 로마 셋집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파 오요한 2014-10-16
33 [사도행전] 사도행전 27장 강해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오요한 2009-01-30
32 [사도행전] 사도행전 26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두번째 간증 메시지 오요한 2009-01-30
31 [사도행전] 사도행전 25장 강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오요한 2009-01-28
30 [사도행전] 사도행전 24장 강해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오요한 2009-01-28
29 [사도행전] 사도행전 23장 강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오요한 2009-01-27
28 [사도행전]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오요한 2009-01-25
27 [사도행전] 사도행전 21장 강해 복음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오요한 2009-01-23
26 [사도행전] 사도행전 20장 강해 바울의 고별설교 오요한 2009-01-20
25 [사도행전] 사도행전 19장 강해 에베소 교회의 제자양성 오요한 200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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