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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25장 강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28 00:00:00
조회수 : 4,103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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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강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말씀 사도행전 251-사도행전 2527

요절 사도행전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바울은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과 그의 부인 버니게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재판을 통하여 왕과 총독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만드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가이사에게 항소하여 재판받는 것을 통해서 로마에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습니다.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소하는 유대인들)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바울은 벨릭스 총독 때에 가이샤라 헤롯궁에 이 년을 갇혀 있었습니다. 벨릭스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삼 일 후에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도임은 직역하면 도(province)에 발을 올려 놓았다는 뜻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베스도는 58-60년경에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62년경 사망하기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베스도 신임 총독은 부임한 다음 날 하루를 쉬고 사흘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로운 곳에 처음 부임한 베스도는 자기 관할 구역의 실태를 하루라도 빨리 파악하여 지역의 유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유대의 수도이자 종교적 중심지였으므로 그곳부터 방문하였습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가자 예루살렘에 대제사장들과 유력한 자들은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대제사장은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이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벨릭스 통치 말기에 이스마엘로 하여금 아나니아의 대제사장직을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형은 전임자들까지도 포함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전직 대제사장들도 대제사장으로 불리었고 그 위치가 존중되었으므로 이들을 대제사장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이고 종신제이며 자손에게 계승되었으나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는 권력자들에 의해 자주 바뀌게 되었습니다. 높은 사람들은 산헤드린의 영향력 있는 회원들을 가리킵니다.(15). 신임 총독이 관할 지방의 유력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을 잘 알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금 바울을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산헤드린이 바울을 잡아죽이려는 의지가 매우 집요하였습니다. 그들이 무려 2년이 지나도록 바울을 죽이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주의 종을 죽여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자 합니다.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라는 종교지도자들)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호소하는 도중에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 이하 산헤드린은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바울을 죽일 수 없었으므로 불법적으로 바울을 살해하려 합니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악용하여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경우 자객을 매복시켰다가 중간에서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전에도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자객 40여 명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의 생질을 통하여 보호해주셨습니다.

 

(가이샤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하는 베스도)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옮겨달라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바울이 가이샤라에 구류되어 있고 자신도 멀지 않아 가이샤라로 떠날 것이니 가이샤라에 와서 고소하라고 말합니다. 베스도는 결코 호락호락한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우호와 행정적인 일 처리를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전임자인 벨릭스가 베스도에게 바울 사건에 대한 개요를 일러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으므로 도주할 우려가 없다고 합니다. 베스도 자신이 멀지않아 가이사랴로 떠나갈 것이므로 굳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올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멀지 않다는 말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빨리 나아갈 것을 말합니다. 유력한 자는 15절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책임있는 대표자입니다. 베스도는 그들의 재판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이사랴에 내려가서 소송을 하라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사람을 보내서 바울을 호송해오자면 여러 면에서 번잡스럽습니다.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법정에 구류되어있는 자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 데려와 재판한다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못합니다. 결국 베스도의 신중한 판단으로 바울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가이샤라에서 바울에 대한 고소)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팔 일 후에 베스도는 가이사랴에 가서 바울을 재판하고자 하였습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무른 기간에 대해 헬라어 성경들 가운데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10일 이상으로 되어 있고(more than ten days, RSV), 화란어 성경에는 8일 혹은 10일 이상을 지내지 않고라 되어 있습니다(notmore than eight or ten days, RSV). 한글개역성경은 8일 혹은 10일로 말합니다. 베스도가 가이샤라의 재판장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공식적인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산헤드린, 벨릭스 총독에 이어, 베스드 총독을 통하여 세 번째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22:30, 24:1-22)

바울은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에 대해 자신의 무죄함을 또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사회소란 죄의 중대한 사건으로 고소하고자 하나 증거를 댈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번에는 변사를 동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에게 위압감을 주어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소는 더둘로의 것에 비해(24:5, 6) 더 새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중한 죄목으로 송사하였으나 단 한 가지도 능히 증명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이 소송사건이 무려 이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 내용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증인을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전혀 터무니없는 사실로써 모함하려 하니 증인은 더욱 세울 수 없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바울)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증거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에게 제기된 모든 고발을 집약적으로 종합하여 반박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대하여 죄가 없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가리켜 반란자, 또는 사회소요자라고 말한 것(24:5)에 대해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는 단언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의 변론을 반박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이사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2-44)의 속명(俗名)이었으나, 그의 양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B.C. 27년에 로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가이사는 로마 황제의 일반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재판 받을 것인가 묻는 베스도)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는 유대인의 환심을 얻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을 것인가 물어보았습니다. 원고측과 피고의 진술을 다 들은 베스도는 즉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소송을 제기했던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7, 8), 이제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죄 선언을 한 후 즉시 석방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베스도가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은, 바울을 석방할 경우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부임 초부터 유대의 지도자들과 부딪쳐 그들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통치는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총독 관할 지역의 주민들이 총독에 대한 불평을 황제에게 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고발을 당한 총독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베스도는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심을 얻고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을까 물어보았습니다.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지금 로마 황제의 법정에 서 있지 예루살렘 법정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은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는 대로, 자신은 유대 사람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만일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질러서, 사형을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하였으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 목숨에 연연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자신을 고발하는 이 사람들의 고발 내용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이므로 자신의 재판을 로마황제에게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바울은, 베스도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려 하는 의도를 보이자 즉시 가이사에게 항소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심각한 음모가 기다리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323:14-16). 로마 시민은 지방 행정장관의 판결에 불복하여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 받았습니다. 특히 지방 행정관의 심한 압제를 받거나 중대한 재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지방 관청은 그 호소한 자를 로마에까지 호송하여 황제의 재판을 직접 받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고 그는 54-68년에 걸쳐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네로는 폭군으로 유명하나 통치 초기에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와 집정관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등의 영향으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바울이 황제에게 항소한 때는 네로가 선정을 베풀던 시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가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황제)에게 항소했을 때 그는 단지 공정한 재판만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소망했습니다.(19:21) 유대인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바울을 로마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기회를 얻었습니다. 예수님도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할 소명923:11)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자신도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를 통하여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가이사에게 보내고자 하는 베스도)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에 호소하는 내용을 배석자들과 상의하였습니다. 배석자란 배심원 회의의 위원들이며, 의회의 판사들, 법 전문가들, 그리고 총독의 고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총독이 내리지만 배석자들과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과연 바울에 대한 고소가 가이사에게 호소할 만큼의 중대한 것인가를 논의하였습니다. 중대한 소송건일 경우에 그 항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반란 죄로 고소하였고(24:5), 반란죄는 그 무엇보다 중대한 제목이었으므로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란죄로 고소한 것이 오히려 로마에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스도가 무죄한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바울의 항소를 받아들인 것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문제가 그에게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9절 주석 참조), 이 불편한 재판에 대한 판결을 황제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정치적으로 손상을 입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샤라를 방문한 아그립바왕)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수일 후에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러 가이샤라로 왔습니다. 아그립바왕은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자 헤롯 대왕의 증손인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27-100)입니다. 아그립바 일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고로 벌레먹어서 죽은 자입니다. 아그립바 이세는 어려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황실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부친처럼 친로마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A.D.44년 그의 아버지가 별세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7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왕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로마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A.D. 50년경에 글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아그립바 2세는 갈기스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팔레스틴의 통치자로 부상되었습니다. 그후 글라우디우스는 그에게 더 많은 영토를 맡겼는데, 빌립의 관할 지역, 아빌라, 트라코니티스, 아크라등을 맡겼습니다. 아그립바의 통치지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네로에 의해 갈릴리, 다리게아, 디베랴등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매우 친로마적이어서 유대인들이 반로마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는 66-70년에 걸쳐 있었던 전쟁 기간에는 더욱 철저히 로마에 충성해서 전쟁 후 더 많은 영토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 왕은 친로마 관계로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할 때마다 예방하여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버니게 여인은 아그립바 2세의 한 살 아래 누이이자 벨릭스 전 총독의 처인 드루실라(24:24)의 언니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철학자 필로의 조카인 마르쿠스와 약혼한 적이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후에 그녀는 삼촌인 헤롯과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48년에 남편이 죽자 오빠인 아그립바 2세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그녀는 길리기아 왕 폴레몬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다시 오빠에게 돌아왔습니다. 이때 이들 사이에는 근친상간의 불륜이 저질러졌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었습니다. 버니게는 70년 이후에는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티투스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으나 여론의 악화로 끝내는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니게가 오빠 아그립바와 함께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러 온 지금은 아마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오빠 집에서 함께 거할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재판하지 않았음을 밝힘)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들이 거기에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에, 베스도가 바울을 두고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왕 앞에 내놓고 말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를 문안한 것이 다소 길어진 듯합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의 명성과 권위로 보아 바울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판단하고서 바울 이야기를 화제로 꺼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직접 유대를 통치하지는 않았지만 글라우디우스 황제가 왕에게 성전의 후견인의 자격과 대제사장의 임명 및 파면권, 그리고 성전 창고와 제사장의 예복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유대 사회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벨릭스가 가두어 둔 바울이 있다고 합니다.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발하여, 총독에게 유죄판결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기가 겪은 사건의 줄거리를 아그립바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새로운 사실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단지 바울을 고소만 한 것이 아니라(2),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유죄 판결을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들에게 로마 사람의 관례로서는, 피고가 원고를 직접 대면해서, 그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는, 그 사람을 넘겨 주지 않는 것이 전례라고 대답하였다고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억지 주장과 총독 베스도의 법적 공정성이 대조됩니다. 로마의 사법 관행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며, 피고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3) 법을 준수함으로써 로마법의 정의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베스도의 진술은 자신이 법에 의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을 과장하여 강조합니다. 처음에 그가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자신이 가이샤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4), 재판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9) 완전히 공정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아는 베스도)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고소한 종교지도자들이 가이샤라에 같이 왔으므로, 베스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다음날 재판석에 앉아서, 바울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베스도는 8-10일 지나서 재판을 신속하게 열었습니다(6). 그는 재판을 지연시키면서 직무를 유기하거나 뇌물을 기대하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강조합니다. 이는 전임자인 벨릭스의 우유부단한 처사와 대조됩니다.(24:22). 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베스도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력한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바울을 고소했을 때,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명망으로 보아 바울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중대한 악행을 범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이 열리자 베스도의 짐작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로마법에 의해 유죄에 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7). 그들이 바울과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스도는 성전모독에 관한 사항은(24:6) 제외하고 부활에 관한 문제를 말합니다.(24:21) 바울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범죄자로 정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순한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였습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바리새인들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의 부활만큼은 유대지도자들이 다 반대하였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는 로마 법정에서 다룰 성질이 아님은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경우에도 종교적 문제로써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고자 안간힘을 썼을 뿐입니다(23:4, 14).

 

(가이사에게 호소한 바울을 소개)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베스도는 자신의 종교 문제에 관한 무지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가 물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바울을 석방하지 않고 머뭇거린 것은 무지탓도 있었겠지만 그 배후에는 고소자들이 바울을 무죄로 선언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베스도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황제는 라틴어 아우구스투스에 해당하는 형용사로서 존엄한, 존경스러운이란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원래 숭배하다 경외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B.C. 27년 로마 최초의 황제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헬라어로는세바스토스)라는 칭호를 받은 이후로 이는 가이사와 더불어 로마 역대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아그립바)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자신도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 관하여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도에 해당하는 표현(also myself)을 사용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다시 한번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총독(본디오 빌라도) 앞과 아그립바의 증조부인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 증언한 것과 유사합니다.(23:8)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했던 반면(23:11),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베스도가 내일, 그의 말을 들어 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바울을 데려옴)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엄을 갖추고 나와서, 고급 장교들과 그 도시의 요인들과 함께 공청실로 들어갔습니다. 베스도의 명령으로 바울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위엄 있고 호화찬란하게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버니게의 사치와 화려함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시기에 그의 오빠 아그립바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피하도록 권유하는 순간에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오빠 옆에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그립바 남매를 필두로 하여 천부장을 비롯하여 성중의 유력 인사들이 뒤따라 화려하게 들어왔습니다. 접견실은 공개적으로 청취를 하는 공청실을 뜻합니다. 재판은 이미 끝났고 바울의 항소는 받아들여졌으므로 다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마 청문회의 형식이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 최고의 권력자들과 실력자들의 위세와 화려함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이 왜소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목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9:15).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고자 결정하였음)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 때에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 그들과 함께 계신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나 여기에서나, 모든 유대 사람이 그를 이 이상 더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자신에게 재판을 청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바울을 송사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직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바울을 해하려 했던 군중들을 감안한다면(21:27-36)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이 사형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무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그러했고(23:29), 벨릭스도 마찬가지고.(24:22, 23), 지금은 베스도까지도 바울의 무죄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석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매번 바울이 석방되지 않은 사유가 있었지만(9-1223:20-2424:22), 그런 것들은 정당한 사유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판결의 지연이 바울을 로마로 향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311에 예수님이 바울은 로마에서 증언해야한다고 하신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주님이 섭리하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스스로 황제께 상소하였으므로, 자신은 바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황제는 21절의 세바스토스와 다른 칭호입니다(21절 참조). 황제 퀴리오스는 주(Lord or His Majesty)라는 뜻의 칭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나 디베료는 이 칭호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권위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사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칼리굴라 때부터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도미티안 황제 때에는 공인된 칭호가 되었습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자신의 동전에 이 칭호를 새겨넣기까지 하였습니다. 본래 이 칭호는 통치자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점차 황제 숭배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은 퀴리오스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문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고 그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습니다. 폴리갑은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아 순교당한 인물의 예이기도 합니다.

 

(황제에게 보낼 죄목을 찾고자 함)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베스도는 그와 관계되어 있는 일을 황제께 써 올릴 만한 확실한 자료가 없으므로, 여기에서 그를 신문해서, 내가 써 올릴 자료를 얻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그립바 왕 전하 앞에 끌어다가 세웠다고 합니다. 베스도의 난처한 입장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9)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가 물었다가 바울의 항소를 받았습니다.(11). 그런데 문제는 바울을 최고 법정인 로마에 보낼 때 함께 보내야 할 혐의 사실이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황제가 보아서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한 상소 재료도 없이 바울을 올려 보낼 수 없습니다. 그는 상소 재료를 찾기 위하여 이 청문회를 열기로 한 것이며 아그립바의 심문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천부장 루시아가 벧릭스에게 써보낸 것과 같은(23:26-29) 애매모호한 조서를 올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구체적인 죄목을 명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죄수를 보내면서, 그의 죄목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합니다.비합리적이고 정신나간 일이라 재판을 연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바울의 공통된 소원을 배웁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와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5장 강해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바울

말씀 사도행전 251-사도행전 2527

요절 사도행전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사도행전 25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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