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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이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25 00:00:00
조회수 : 3,961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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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말씀 사도행전 221-사도행전 2216

요절 사도행전 227절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성전과 유대인과 율법을 무시하였다는 고소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변화된 간증을 통하여 자신이 전혀 성전과 유대인과 율법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만 자신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났고 은혜의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자신과 같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은혜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말로 말하는 바울)

 

1,2절을 보십시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오해로 인하여 유대인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 천부장을 보내사 바울을 결박하여 보호하셨습니다. 바울은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구제헌금을 전달할뿐 아니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를 이루고자하는 소망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유대인의 전도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갖고 유대인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부형 여러분, 자신이 이제 여러분에게 드리는 해명을 잘 들어 달라고 합니다. 부형들은 형제들과 선배 여러분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연설할 때도 부형들이라고 부르며 매우 정중하게 말하였습니다.(7:2). 부형이라는 호칭은 조상들의 하나님, 저 의인의 호칭과 함께 유대인을 깊이 이해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자신과 유대인 무리들과의 동질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자신도 이스라엘의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자신이 변화된 것을 변명합니다. 현대 영어의 변명(apoiogy)이 해명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무리들과의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아람어로 해명하였습니다. 무리들은 바울이 배교자이자 민족을 버린 자로 여겨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모국어로 말하자 그들은 너무도 뜻밖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 대다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잘 몰랐습니다. 심지어 1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대인 학자인 필로조차도 모세 오경에 대해 방대한 주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어로 씌어진 오경을 해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하자 메시지를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율법이 엄한 가말리엘 문하생)

 

3절을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 출신임을 말합니다. 다소 성에서 성장했고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가말리엘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5:34). 로버트슨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유대인들로부터 우리의 랍비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리어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워서 그 누구에 못지않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에게 엄한 율법적인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소개함에 있어서 태생(길리기아다소, 21:39), 성장(이 성에서) 그리고 교육(가말리엘 문하)에 관해 언급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고 율법에 정통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교에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예를들어 설명합니다.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울)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율법에 열심이 있어서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도를 핍박하는 자로 여러 곳에서 소개합니다.(26:10고전 15:91:13, 233:6딤전 1:13). 유대인 무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보다 바울은 훨씬 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처넣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교회에 대해 핍박한 사례들이 더 많았습니다. 바울이 후에 자신을 가리켜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딤전 1:13), 또는 죄인 중의 우두머리(딤전 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바울의 과거에 대한 증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증인이므로 바울의 말은 최고의 신빙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성도를 핍박하였으며(9:2), 산헤드린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서명한 위임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92절에서는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는 대제사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까지도 공문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2에서 공문을 받은 것이 대제사장 개인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전체 산헤드린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의장 즉 대표로서 서명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해명할 당시의 대제사장은 아나니아였지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당시에는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도 잡아 끌어다가 예루살렘에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 공문을 받아서 가던 자였습니다. 다메섹은 동쪽으로 안티레바논 산맥과 남서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아스왓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대 수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이 도시는 바르발 강을 끌어들여 관개 용수로 사용한 과수원과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의 성도들 가운데 다메섹으로 피난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큰 빛을 만난 바울)

 

6절을 보십시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에 부활의 주님이 오정 즈음에 은혜로 그를 큰 빛으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사도행전 93과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입니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9:9). 그런데 이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추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습니다.(11). 큰 빛이 바울의 어둠을 비추었습니다. 큰 빛은 참 지식의 빛으로 바울의 무지를 비추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빛을 만나면 우리의 무지가 사라지고 분별력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큰 빛을 통하여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였습니다. 큰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사도바울에게 생명의 큰 빛이 비치었습니다. 그는 큰 빛으로 진리를 알고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사울을 찾아온 나사렛 예수)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은 땅에 엎드려져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는 사도행전 94절과 거의 동일한 표현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땅에 거꾸러져로 옮겨졌습니다.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아십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바울이 누구냐고 묻자 소리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도 역시 사도행전 95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늘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28:20).

 

(바울만이 알아들은 소리)

 

9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함께 있는 사람은 빛은 보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빛을 보았다는 것은 이것이 바울만의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조현증 환자가 겪는 환청이나 환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 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바울만이 그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습니다. 바울은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10).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려고하는 바울이 예수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계획하고 부르신 예수님)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바울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여쭈었습니다. 사도행전 9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기록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이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합니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행할 일을 누가 말해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살피고 있었으며 이제 그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멀은 바울은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먼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몇 초 또는 몇 분 안에 곧 정상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멀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9:8).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된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어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신 예수님은 해보다 더 밝은 큰 빛되시는 분이십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됨)

 

12,13절을 보십시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10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가 와서 사울아 보라고 말하였을 때 바울은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과정이 사도행전 9장에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보라는 명령은 더 분명하게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 입니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을 강조해 줍니다. 바울은 시력을 회복하여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바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때 죄사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보게 하시고 음성을 듣게 하신 하나님)

 

14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할 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잘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 의인 예수님 예수님을 보고 그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미리 손으로 잡다란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세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바울에게 당신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될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데에서 믿음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는 의인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 의인은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7, 8). 이 세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바울을 모든 사람의 증인 삼으심)

 

15절을 보십시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큰 빛되신 분이십니다. 성도와 함께 박해받은 분이십니다. 죄인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시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죄인을 사도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를 예수의 증인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 곧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해야했던 내용은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본 예수님을 충실히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고 들음으로 변화된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습니다(4:20). 큰 빛이 임하면 우리의 어둠과 무지가 물러갑니다.

 

(죄사함을 받은 바울)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아나니아는 이제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세례와 죄 씻음을 연결하여 말합니다. 당시에 세례 의식이 죄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세례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며, 죄사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무명의 아나니아를 통하여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하시고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게 도우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바울의 첫번째 간증 메시지

말씀 사도행전 221-사도행전 2216

요절 사도행전 227절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22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예수님

말씀 사도행전 2217-사도행전 2230

요절 사도행전 2225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에 열심이던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변화된 것은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긍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받은 이방인 사도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들도 이방인 전도의 사명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이방 땅으로 보내심)

 

17-18절을 보십시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 즉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사도행전 92 갈라디아서 117-19)라고 봅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 중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 계시의 진정성에 대해 함부로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언해도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지 않을 테니 너는 예루살렘을 나가 멀리 이방인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29에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한 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는 바울)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자신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스데판을 죽이는 것을 찬성하고 증인이 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반문하였습니다.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7:57-60).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습니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증인은 요한계시록 213, 176에서 처럼 순교자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흠정역에서는 순교자(martyr)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때 감히 이방인에게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차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예수님)

 

21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주님은 재차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을 반복하여 내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통하여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가 받은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전도는 바울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주신 예수님이 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계만민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계 50억의 인구가 눈에 밟혔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이즘에서 벗어났고 헬라어를 잘하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없이하고자하는 유대인)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대인들은 격분하였습니다. 바울의 조심스러운 연설을 잠잠히 듣던 무리들은 바울의 이방 선교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이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21:36). 그들은 바울을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렸습니다. 오히려 살려둘 자가 아니라는 첨가어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며 우월의식과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연속되는 세 개의 현재 분사형 떠들며,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날리며는 격렬한 분노와 흥분으로 인하여 종잡을 수 없이 설치고 날뛰는 난폭한 군중들의 모습을 매우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표현은 극한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개 비통, 울분, 애통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묘사됩니다(2:12 삼하 16:13 18:19). 그들은 다만 즉각적인 분노를 표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대단하였습니다. 자신들과 이방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자 그들은 영접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강한 유대이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헛된 민족적 자부심이 강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보면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와 같습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고자 합니다. 이방인이 죽는 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으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세계 만민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세계 만민이 구원받기를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유대인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 선교를 영접지 못하자 하나님은 세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방인 전도를 하였지만 이방인 선교에 적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부 없이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는 적격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잘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쁨으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쓰셔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의 복음화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하는 자를 친히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넓은 마음으로 이방인 전도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좁은 유대이즘을 회개하고 넓은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해야합니다.

 

(바울을 채찍질하고자하는 천부장)

 

24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천부장은 히브리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메시지를 전했는지 몰랐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리고 가서 채찍질하여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 아람어로 말했으므로, 천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군중들의 흥분으로 보아 바울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채찍은 가죽 끈에다 쇠조각과 뼈를 매단 것이며 이것으로 심하게 맞을 경우 불구자가 되거나 죽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이 채찍질은 로마인이 아닌 사람이나 노예를 심문할 때 사용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채찍질을 가하여 심문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전도 활동 중에 매를 맞는 고난을 많이 당했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태장(笞杖)을 세 번 당했고 한 번은 돌로 맞았다고 합니다(고후 11:24, 25).

 

(로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바울)

 

25-26절을 보십시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바울은 자신을 치고자 가죽줄로 매자 로마 시민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때릴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게 핍박을 피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혐의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기 위해 기둥이나 말뚝에 채짹질하기 좋은 위치와 자세로 묶었습니다. 이때 채찍질의 표적은 대개 등짝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발레리안 법과 포르시안 법에 의해 보호를 받았습니다. 로마인은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고 함부로 채찍질을 가할 때는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쥴리안 법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 법정에 호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아무런 혐의도 없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당한 채찍질을 가하려 한 데 대해 항의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을 통하여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빌립보 전도에는 그대로 채찍에 맞았지만 이번에는 채찍을 거부하였습니다.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로마 시민인데 어찌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들은 백부장은 매우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로마 시민을 결박하여 채찍질을 가한 것은 명백한 범법행위였고 그것에 대한 처벌이 어떤 것인지는 백부장 본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확인한 천부장)

 

27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

 

천부장이 네가 로마 시민이냐고 묻자 그러하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상당히 당황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우라면 피의자인 바울을 자기에게 불러 사실 여부를 묻는 것이 상례일텐데 지금은 그가 직접 바울에게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네가 로마 사람이냐"에서 네가의 위치가 강조적인 자리에 있는데 이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 천부장의 당황한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에 비해 바울의 대답은 담담하고도 단호합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애써 증명하려 하거나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단지 간단하게 그러하다고만 대답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단호한 대답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의 로마 시민들은 토가라는 긴 겉옷을 걸침으로써 로마 시민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토가는 착용이 불편했기 때문에 국가적 행사등이 있을 때 외에는 잘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 토가를 입고 있었다면 로마 군대에 의해 연행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민족적 배타성이 강한 예루살렘이었으므로 더더욱 토가 옷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인 바울)

 

28,29절을 보십시오.“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천부장은 많은 돈을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산 사람이나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로마인이 아니고서는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중요한 자격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로마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 만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상당한 명예와 권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민권이 뇌물에 의해 주어지기도 했고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공개적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특히 황제 글라우디오 때에는 그의 아내까지도 이 시민권을 팔아 치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인 것을 감안할 때(23:26)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의 생각에는 자기는 많은 돈을 들여 시민권을 샀는데 전혀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 초라한 바울의 외양을 볼 때 어떻게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는지 의아하였습니다. 바울이 나면서 시민이라는 말은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문이 언제, 어떻게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대체로 그 가능한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측됩니다. B.C.171년경 다소가 헬라의 시()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바울의 선조도 그 엘리트들 중에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의 선조 중 누군가가 로마의 행정관이나 장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바울의 선조가 돈을 지불하고 취득하였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결박한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를 심문하려던 자들은 물론 심문을 명령했던 최고 책임자 천부장도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천부장은 뒤에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위 보고서를 총독에게 보냈습니다(사도행전 2326,27)

 

(공회 앞에 선 바울)

 

30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이튿날 천부장은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인이었고 로마법에 의하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심문할 수 있었으므로 고소자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함부로 바울을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원인 규명을 해야 했고 또 그 문제가 종교적인 것이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한 것입니다. 천부장이 바울 사건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흥분된 군중에 의한 여론 재판을 피하여 유대 민족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사실을 규명하려 하였습니다.

사실상 산헤드린은 바울을 적대하고 그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무리들이 가득한 반() 기독교 집단이었습니다. 바울이 거기에서의 심리(審理) 받는 것은 불리할 것이 자명하였습니다. 바울이 산헤드린에 서게됨으로써 사건은 또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23 ). 바울은 로마시민임을 이용하여 채찍을 피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이제 그는 공회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뱀처럼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사도바울을 변화시킨 예수님)

 

사도 바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특히 우리에게 캠퍼스 지성인 복음화를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학생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양들을 인도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로마 시민된 자를 채찍질 하느냐

말씀 사도행전 2217-사도행전 2230

요절 사도행전 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2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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