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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17장 강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전도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12-06 00:00:00
조회수 : 2,88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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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강해 일부 데살로니가 베뢰아 전도

말씀 사도행전 171-사도행전 1715

요절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6장에는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옵니다. 사도바울은 마게도냐에 첫성인 빌립보에서 전도합니다. 하나님은 루디아를 통하여 가정교회를 이루고 빌립보의 감옥에서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간수의 전도를 이룹니다. 빌립보 전도의 시작에는 항상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세 지역 전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서로 특색 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삼 주 성경을 가르친 데살로니가)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여기서 우리가 그들이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을 볼 때 누가는 빌립보에 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정치, 무역,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늘 하는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 곧 삼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삼주 동안에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삼 주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를 증거함)

 

3절을 보십시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데살로니가서를 참고로 하면 바울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기초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인하여 해를 받고 죽으신 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성서적 메시야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고난이 없는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경제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야관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는 메시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경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 죄사함의 복음, 부활의 복음,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선교 일선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확신을 가진 유능한 성경선생이 필요합니다. 복음 진리를 전하는 유능한 성경선생만 있으면 복음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바울의 메시지의 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신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18:37)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여 믿는 자의 왕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 되시고 사랑이 되시고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을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생명의 구주요 살아계신 왕되심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 것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믿는 자가 바울을 따름)

 

4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에서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9)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5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부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부인으로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차고 밍크 코트를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을 자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숨은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단지 삼 주만에 데살로니카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시기하는 자가 핍박함)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자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긍지가 지나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하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영접하고 배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시장의 깡패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방법적인 면도 불량하였습니다.

야손이 집에 침입하여 바울 일행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를 가르친다고 하며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하였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영적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를 방해함으로 자기들의 죄를 채우고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4-16). 이를 볼 때 시기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큰 죄임을 배웁니다.

 

(야손을 범인 은닉죄로 고소함)

 

6,7절을 보십시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바울을 잡지 못하고 바울을 머물게 한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야손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바울 일행을 집에 머물게 했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천하에 새로운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은 야손을 범인 은닉죄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이사의 명령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예수를 전하는 반역자라고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 다른 왕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습니다. 진리의 왕, 평화의 왕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소할 때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무리와 똑 같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시기하여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자식입니다. 사단의 속성이 시기하고 거짓된 것이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전하면 어디에나 핍박이 있습니다.

 

(야손은 예수 믿고 손해봄)

 

8,9절을 보십시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무리와 읍장은 이들의 고소를 듣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읍장은 야손 일행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야손과 형제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야손은 예수님을 믿고 물질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베뢰아에 대한 소개)

 

10절을 보십시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바울이 밤에 데살로니가에서 도망하여 베뢰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핍박의 때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망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습니다. 시골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항상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당하면서도 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구원하고자 하였고 이방인 전도를 통해서도 유대인 구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임을 영접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의 많은 핍박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그러운 사람들)

 

11절을 보십시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서 30분 떨어진 시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 밭이 좋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너그럽다는 것은 마음이 트인 자, 고결한 사람들, 교양적인 사람들이라고 다른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말씀이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좋은 마음 밭을 갖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말씀을 잘 영접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을 보면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보다 말씀 받는 자세가 더 좋았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마음이 넓고 고상한 인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는 "마음이 트였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하여서 마음이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탁 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신사적이었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음)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간절히 사모(with great eagerness)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를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실망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대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에 영적 소원이 없고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겸손하게 귀 기울여 말씀을 경청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 비밀을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주어집니다(4:11).이들은 1950-60년대에 한국인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요즘에 한국인들은 아덴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는 사람들)

 

베뢰아 사람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했다는 것은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성경을 연구하였다 찾아보았다는 뜻으로 다른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탐구하는 마음, 깊이 생각해보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자세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받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자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그들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였을 때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바른 자세)

 

베뢰아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씨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합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심판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사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베뢰아에서 믿은 사람들)

 

12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데살로니카에서와 같이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게 많이 믿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을 믿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베뢰아에서 복음전하는 일을 친히 도우셨습니다.

 

(베뢰아에서 핍박하는 유대인들)

 

13-14절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은 베뢰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변화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와서 바울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과거 예수님 믿는 자를 원정하여 핍박하던 것과 같이 그들은 원정을 와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비신사적이고 야만적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바울만 먼저 배로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양들을 도왔습니다.

 

(우리의 살아계신 왕 예수님)

 

우리는 말씀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초라한 바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우리 교회에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명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우리의 살아계신 왕으로 믿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강해 일부 데살로니가 베뢰아 전도

말씀 사도행전 171-사도행전 1715

요절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사도행전 17장 강해 이부 아덴 전도

말씀 사도행전 1716-사도행전 1734

요절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지금까지 바울은 실리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를 하였습니다. 데살로니카 전도에는 누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두고 혼자 아덴에 이르러 예수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바울은 마치 혼자서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장군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아덴에 이르러 디모데와 실라를 부름)

 

15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은 배를 타고 아덴(아테네)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누가는 데살로니가에 두고 디모데와 실라는 베뢰아에 남아 복음 역사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인도해준 사람들에게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에 있는 자기에게로 속히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역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역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울도 동역자가 있어야 함이 났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에는 오지 않고 바울이 고린도로 갔을 때 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전도할 때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서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을 얻어 전도합니다.

 

(아덴에 대한 소개)

 

16,17“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덴은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의 하나로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곳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에피큐로스학파, 스토아학파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했을 때 그의 기대는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이제 유럽의 중심지로 들어갑니다. 그의 선교지역이 점점 넓어집니다. 그의 전도지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상에 대한 분노)

 

그러나 아덴에는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아덴에는 시민들의 수보다 우상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아덴에는 삼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우상을 숭배합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고사를 지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그곳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자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 분노는 영적 분노였습니다. 유명한 아레오바고 메시지가 이 영적 분노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영적 분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노입니다. 요즘에는 영적으로 분노하는 사람이 심히도 드뭅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을 잘 부립니다. 자신의 인격이 손상되면 분노합니다. 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진리에 기초해서 살지 않고 물질과 육신과 자기를 기초로 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노를 하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 날마나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에 기초해서 사는 사람만이 영적인 분노가 생깁니다. 바울은 영적 분노가 일어나지만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아덴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음이 분하여 견딜 수 없어서 회당과 시장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에게 복음을 전함)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습니다. 윤리적인 삶을 위해서 금욕하는 스토아학파도 있었습니다. 어떤 에피큐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과 쟁론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에피큐로스(342-270 B.C.)가 세운 학파입니다. 그는 향락 추구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향락이란 육적인 것이 아니요 정신적으로 모든 고통, 욕정, 미신적 공포에서 벗어난 심적인 향락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타락하여 신약시대에 와서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쾌락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신은 존재하지만 세상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감미로운 잠에 불과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먹고 인생을 즐기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우주는 원자의 우연한 운동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며, 인간의 영혼도 원자들의 합성체로서 언젠가는 소멸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유물론자들로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340-265 BC)라는 사람이 창설한 학파로서 에피큐로스 학파와 대립됩니다. 그는 물활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을 세계의 영이라고 하며 모든 사물에는 다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우주 이성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소멸하는 불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철저히 무관심함으로써 최고의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범신론으로 무장한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모두 헬라의 2원론 사상에서 나온 학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몸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과 변론하며 복음을 심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자신이 빛으로 만난 그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종교와 다릅니다. 세상의 종교는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혹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신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덴 사람들)

 

19-21절을 보십시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비고 광장으로 갔습니다. 이 새 교가 무엇인지 듣고자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이곳 언덕에는 평평한 바위 광장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공개 강연도 했으나 주로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학술발표장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느냐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가강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데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무슨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첨단을 좋아합니다. 집이나 차나 옷이나 눈썹이나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허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변덕이 많습니다. 바울이 이상한 부활을 이야기 하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은 최신 지식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만 시간을 소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새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논했으나 진리를 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즐기기만 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훌륭한 지성인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천박한 내면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전하는 바울)

 

22-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아덴 설교에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므로 성경을 모릅니다. 일반적인 이야기로 설교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광장 가운데 서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칭찬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을 보면서 분노하였지만 이제는 그들을 칭찬하면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두루다니면 그들이 많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기도하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메시지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종교성이 많음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았는데 그 신에 대해서 알게 해 주겠다고 서두를 꺼내었습니다. 그들은 이만개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짓다가 짓지 못한 신을 알지못하는 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을 소개하여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범신론을 이용하여 유일신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는 철학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이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로서 성경이나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함)

 

24,25절을 보십시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이들에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스스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니체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자신의 손에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손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은혜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에게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종교성이 강하여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런 신들은 생명이 없기 대문에 인간에게 생명을 줄 수 없고 또 인간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체험해야합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26,27 절을 보십시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창조주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시다고 해서 인간의 삶과 무관하게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할 수 있도록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에피쿠르스 학파는 역사를 우연으로 보았는데 사도 바울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노아시대에 모두가 심판을 받은 후에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후에 인간이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대를 정하셨습니다.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죽는 것을 정하셨습니다. 각 사람을 인종과 민족과 거주지를 정하여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게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임)

 

28,2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합니다. 태양이 없이 식물이 살 수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유물론이고 공산주의고 진화론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 시인 중에 아라투스 시인이 사람이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술품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지나 목걸이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바울은 신을 우상 섬기듯이 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겨야 함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시를 통해 그의 능력과 신성을 계시하셨으므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더듬어 발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부족함으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메시지는 이교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교 문화권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창세기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창세기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그 기쁘신 뜻대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천지의 주재시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사 친히 구원역사를 시작하시고, 그의 씨에서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말씀은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기초를 깔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양들과 말씀 공부를 할 때 창세기 말씀으로 복음의 기초를 견고하게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기를 원하심)

 

30,31a절을 보십시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눈감아 주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다시 살리사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죄사함을 주십니다. 바울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셨습니다. 이 역사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날에는 우리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심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31b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썩지 않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많은 증거를 주셨습니다. 빈 무덤이 있고 부활의 증인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증인을 변화시켰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를 비씨와 에이디를 나누었습니다. 안식일이 부활한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을 보지 않고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모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롱하는 사람들)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죽어서 재가 되고 흙이 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조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듣겠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나중에 다시 들어 보겠다고 하며 떠나갔습니다.

 

(믿은 소수의 사람들)

 

33,34절을 보십시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아덴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길가와 같은 척박한 곳에서도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지만 아덴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덴 전도는 미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임을 전해야 하는 메시지)

 

아덴 전도가 이렇게 미미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밭의 문제도 있지만 메시지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핵심 메시지가 빠졌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지금 성령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성경 66권 강해서를 썼습니다. 제가 이런 강해서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그전의 메시지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핵심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깨닫는 것은 여기에 하나 더 강조하여 전해야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목자를 하면서 깨닫는 것은 나는 목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편을 하면서 깨닫는 것도 남편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깨닫는 것도 부모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이들의 남편이요, 부모요.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는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주십니다.

둘째로, 아덴의 역사가 미미한 것은 그들의 마음밭이 좋지 않았습니다. 베뢰아는 좋은 밭이었고 데살로니카는 덜 좋은 밭이었고 아덴은 나쁜 밭이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잘 전해도 마음밭이 좋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 더하면 아덴에서는 바울의 동역자가 함께 없었습니다. 우리는 동역자와 함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있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아멘!

사도행전 17장 강해 이부 아덴 전도

말씀 사도행전 1716-사도행전 1734

요절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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