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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9장 강해 사울의 변화와 베드로의 큰 믿음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9-18 00:00:00
조회수 : 3,171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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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강해 일부 사도바울의 변화

사도행전 91-사도행전 931

요절 사도행전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하나님은 사마리아 전도에 이어 이방인 전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방인 전도의 준비로 사울의 변화를 기록합니다. 바울의 개종은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던 A.D.40년 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지로서,선교가 유대 땅과 사마리아와 인접한 몇몇 도시들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던 시절입니다.

이 시기에 바울의 개종은 기독교 선교의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귀한 종을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계선교를 위해서 예수님이 사울을 친히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사울)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를 합당히 여겼습니다. 그는 각 집에 예수 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예수교를 박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위협과 살기를 내뿜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22:4)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가서 시리아 수도인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40Km 였으므로 보행으로는 약 7일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고자 하였습니다. 다메섹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 회당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이 유대교를 박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세계에까지 전하고자하는 유대교 선교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무지한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는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때는 정오였고 강렬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22:6) 그 빛은 정오의 햇빛보다 더 강렬한 빛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있어서 예수님이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그의 거짓과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삼일 동안 눈이 멀정도로 아주 강렬한 빛이 비치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너무 행복하게 죽고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에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의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비추었습니다. 그분은 큰 빛 되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해와 같이 밝은 빛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면 우리의 내면에 어둠이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충만히 임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4절을 보십시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바울은 빛을 보고 눈이 멀어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변화산에 있을 때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성도는 교회의 몸입니다. 그는 몸을 핍박할 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도 핍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할 때 하늘에서 예수님은 고통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가시채를 뒷발짓’(26:14)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는 그 대항하는 만큼 스스로를 해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핍박자와 대화를 먼저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먼저 일방적인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그분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바울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무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빛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는 이 질문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모세도 부르심을 받을 때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진리이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생명과 진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빛 속에서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22:8) 원어에는 예수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나사렛 예수로 사셨습니다. 흙수저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금수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바울의 무지를 깨우쳐주고자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고자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사도로 쓰시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때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는 한 순간에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모든 세계관을 순식간에 뒤집었습니다. 율법주의를 은혜의 복음주의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과 사랑으로 찾아올 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울을 다메섹으로 보낸 예수님)

 

6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바울에게 일어나 수리아 땅에 있는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삼일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회개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입니다. 그곳에 가면 바울에게 말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충만히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사울이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직통계시로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과만 관계를 맺고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명의 아나니아를 통해서 성령을 받게 하심으로 사울을 겸손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소개하고 변호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도바울을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길 가는 사람도 함께 들은 소리)

 

7절을 보십시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같이 있던 사람들은 사울아 사울아 하는 소리를 합께 들었습니다. 바울만의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조현병에 걸려서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객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소리는 들리는데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 어안이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부활의 주님이 이렇게 빛으로 찾아오신 것은 특수한 상황입니다. 이런 예는 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변화시키고자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삼일 회개 기도한 사울)

 

8,9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일시적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맹인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는 사흘 금식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지금까지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평생을 소경으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를 보내시는 하나님)

 

10,1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때에’(10)라는 말씀은 바로 아나니아가 교회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메섹의 성도들은 사울이라는 청년이 결박할 권세’(14)를 가지고 오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1,2). 주님은 이와 같이 삶의 큰 문제가 닥칠 때 낙심하거나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기도하는 성도에게 문제의 해결점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성도의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신수단입니다. 주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비롯해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여러 방법으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16:9 10:3,10,17,19). 또한 환상 중에는 음성도 들려주셨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그와 같은 신비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실 때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온전한 보편적 계시 수단기록된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시점이므로 이런 환상이 많았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정상적인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딤후3:14-17). 지금도 때로는 특수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할 일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였습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말했습니다. 주님이 일어나 직가(반듯한 거리)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이신 예수님)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바울은 지금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 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와 사울에게 동시에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눈을 뜨게 해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바울의 목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사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사울에 대한 아나니아의 선입견)

 

13,14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셨지만 곧바로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해서 여러 사람에게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습니다. 다메섹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한 권한을 대제사장에게 받은 자입니다. 그에게 가면 결박당하여 예루살렒으로 끌려갈 것이 아니냐고 질문합니다. 그는 환상을 이성으로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선입견으로 그에게 가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택한 그릇)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예수님은 사울이 변화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한 예수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택하셨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릇은 누가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악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그릇이 큰 그릇임을 보셨습니다. 그릇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잘못 쓰이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릇의 내용물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사울이라는 그릇을 깨끗이 씻으면 좋은 그릇으로 쓰일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그릇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임금과 유대인을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담아서 문제이지 예수님을 담으면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야흐로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이방 땅으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유대주의 사고에서 벗어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울은 구약성경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담는데 적합한 그릇입니다. 복음을 담아서 전하는데 적합한 그릇입니다. 된장찌개는 뚝배기에 담는 것이 적합합니다.

사울은 이런 유대이즘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다소 출신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습니다. 핍박을 하였으므로 핍박을 받을만한 그릇입니다. 그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만 안다면 그는 세계 선교의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체계화하고 세계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임금과 같이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사울을 변화시키사 어떤 죄인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부르셔서 열두사도들에게도 겸손하게 하시고 바울도 겸손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예수님의 비전으로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비전으로 아나니아를 바라보도록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을 사울)

 

1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박해하였습니다. 이제는 그가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방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한다고 당위성을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예수님처럼 심문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고난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고난을 받을 것을 점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본받아 살아갑니다.

관악삼부 조 사모는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방인 선교는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골로새서 124절에 보면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받고자 힘을 썼습니다. 메시지 전하는 고난, 기도하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제자양성하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죽이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

 

17,18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산파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그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 곧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이 자신을 보내어왔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손을 내밀어 안수하였습니다. 아나니아의 손길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화해의 손길입니다(고후5:20,21). 바울은 그 손길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했습니다(5:5). 그 사랑은 원수의 차가운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습니다.(12:19-21), 바울은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방편이며 무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고전13:1-13).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바울을 다시 보게 하고 죄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죄사함을 받은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주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쓰십니다. 사울은 즉시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졌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받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관한 의혹의 비닐’(18)이 바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랑 때문에 사울은 변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간의 윤리나 법을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즉시 예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나이나를 통해서 성령을 받게 하심으로 사울을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신이 강하여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도 책망하고 자신을 인도한 바나바와도 싸웠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아나니아아를 통하여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족하여 사단의 가시를 두어서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삼일 동안 그는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울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이 모든 역사를 진두지휘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일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를 하나님이라 전하는 사울)

 

19,20절을 보십시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음식을 먹자 강건하여졌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회당에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그는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분명히 영접하고 증거하였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사울의 변화로 놀라는 사람들)

 

21절을 보싮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던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믿기 전에 악명 높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다메섹에 온 것도 예수 믿는 자를 체포하러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사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지 놀랐습니다. 그들은 180도 바뀐 사울의 변화로 놀라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울)

 

2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은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로 놀라워하자 자신이 변화된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더욱 힘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죄사함을 주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통치자가 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살아계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살아계신 왕이십니다.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은 자기 편인 줄 알던 사울이 반대편이 되니 당혹하여 하였습니다.

 

(사울을 죽이고자하는 유대인)

 

23-24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여러날이 지났습니다. 다메섹에서 3년 정도 있었던 기간으로 봅니다. 그 기간 바울은 계속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 시간이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였습니다. 사울을 통하여 예수교가 유대교를 누루고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그대로 두면 자신들이 망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고자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사울은 핍박받는 자가 핍박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다메섹에서 피신한 사울)

 

25절을 보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다메섹 성벽에서 달아내렸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사울이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닙니다. 그에게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공칠 작전을 방불케 하는 야간 광주리 작전으로 사울을 보호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연약한 점이라고 자랑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은 예수님을 전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게 하심으로 사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준비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에 가서 14년을 머물며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준비를 합니다.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는 예루살렘 제자들)

 

2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울이 변화된지 삼년 반이 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였습니다. 15일간 사도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삼년반 동안 다메섹에서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주안에서 사도들과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였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자 제자들은 사울의 옛날 모습을 기억하고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현재와 미래를 보기보다 과거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울을 소개한 바나바)

 

27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그러나 바나바는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위로의 사람이요 넓은 포용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현재와 변화될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소개해주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참고할 때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어떻게 보았는지 주님께서 사울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변화된 후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담대히 증거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알아보고 사울을 나중에 안디옥교회에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은인입니다. 바나바는 제갈공명을 찾아간 유비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변화되기 전의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현재를 보고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현재를 보고 앞으로 쓰일 미래를 보아야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울)

 

28-30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였습니다. 또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변론하였습니다. 바울은 헬라어를 구사하였으므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쉬웠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기서도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아직도 사울이 복음을 전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고향 다소로 가서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거의 14년을 머뭅니다. 다소와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기독교 인생관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한 사람이 방향은 분명히 바뀌었지만 변화되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습니다.

 

(든든히 서가는 교회)

 

31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울이 변화된 후에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습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변화를 통하여 교회에 큰 힘을 주셨습니다. 사울왕을 본따서 사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후에는 작은자라는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9장 강해 일부 사도바울의 변화

사도행전 91-사도행전 931

요절 사도행전 94

사도행전 9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사도행전 9장 강해 이부 예수님의 능력을 소유한 베드로

사도행전 932-사도행전 943

요절 사도행전 9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사울의 회심 이후에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여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똑 같은 일이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 애니아)

 

32,3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 갔습니다. 거기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운 지 8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중풍병으로 자신도 고통하고 주위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애니아를 낫게 하신다)

 

34,3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가 애니야야 예수님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있을 때에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일어나 걸어가라 말씀하심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베드로와 함께 하시며 베드로를 통하여 동일한 이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육신의 몸을 입을 때와 같이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는 살았을 때 육신을 가진 예수님과 동행하듯이 지금은 성령님과 그렇게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기를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친히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은 도르가]

 

36,37절을 보십시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욥바에 다비다라하는 여제자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며 도르가입니다. 도르가는 노루같은 사람, 영양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이 했습니다. 선행을 베푸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뒤에 보면 여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선행을 보고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선행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은밀히 선을 행해야합니다. 그때에 다비다가 병들어 죽자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를 사랑하여 차마 장사치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비다를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

 

38절을 보십시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웠습니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욥바에 와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를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가 지체말고 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릴 것을 믿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도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다비다의 선행을 기억하고 주위 사람들을 통하여 그녀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을 행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도르가에게 간 베드로)

 

3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두 사람과 함께 욥바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죽을 자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성령님을 믿고 다비다에게 갔습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데리고 다비다의 시체가 있는 다락방을 올라갔습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서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습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자신들을 사랑하고 도와주었는지를 말하고 다비다를 살려다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다비다가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주위 사람을 감동키고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다비다를 살린 베드로)

 

4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다락에 있는 사람을 다 내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예수님은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그 부모 외에는 다 내보내고 고쳤습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한 것과 같습니다. 그가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와 함께 계셨습니다.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음)

 

41,4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였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이 일을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제 베드로를 통하여 죽은 다비다를 살리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지금 성령으로 살아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구약에서 엘리야나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는데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도 죽은 자를 살립니다. 부활의 주님이 지금 여기에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일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욥바의 시몬 집에 머문 베드로)

 

4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날 있어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고넬료를 통하여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어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하셔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 역사를 세계에 전하고자 하십니다. 아멘

사도행전 9장 강해 이부 예수님의 능력을 소유한 베드로

사도행전 932-사도행전 943

요절 사도행전 940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사도행전 9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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