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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도행전 15장 강해 은혜의 복음을 굳게 하고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12-01 00:00:00
조회수 : 4,47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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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강해 일부 은혜의 복음을 굳게 하고

말씀 사도행전 151-사도행전 1529

요절 사도행전 15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 말씀에는 유대교의 율법 신앙과 기독교의 은혜신앙이 대랍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그늘을 벗어나 세계화되느냐,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느냐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종교인지 다른 종교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이를 해결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확증하였습니다. 이 총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이 총회의 결정은 "이방인들을 위한 신앙의 자유 헌장"이라고 합니다.

 

(복음주의 신앙과 율법주의 신앙의 충돌)

 

1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사도바울이 일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에 오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파송된 자처럼 목에 힘을 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모세의 법대로 하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하고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은혜신앙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모세의 법대로 반드시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유대교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

 

이들은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였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한 몸에 다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이이든 다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죄와 율법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을 통해서 점차 은혜로 율법을 지키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은혜의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은혜로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였습니다. 은혜 신앙은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알지 못한다면 이들의 주장에 말려들게 됩니다.

 

(율법주의 신앙의 문제)

 

만약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된다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우리는 율법의 종이 되어 복음으로 인한 은혜와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하게 되고 좀 잘하면 교만해져서 남을 판단합니다. 좀 못하면 자학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행위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사는 인본주의 신앙이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가 달라지는 이중적인 자가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다른 종교와 같아집니다.

안디옥 교회의 양떼들은 이들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만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율법적인 생각이 파고들어 오게 되고 심령이 막히고 얼굴이 딱딱해졌습니다. 어떤 성급한 형제들은 할례를 안 받으면 지옥에 가는 줄 알고 일단 할례부터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복음주의 은헤 신앙이 율법주의 신앙으로 큰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삭의 젖떼는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의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두 사도)

 

2a절을 보십시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바울과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 유대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란 영어로 sharp dispute and debate인데 날카롭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성격이 좀 괄괄한 바울이 앞장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로마서가 모두 이런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은혜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제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때로는 책상을 쾅쾅 쳐가며 싸웠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답지 못하고 은혜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까지 다투고 변론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다투고 변론한 것도 하나님의 크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툰 이유가 무엇일까요?

 

(은혜의 복음 진리 수호)

 

바울이 은혜의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는 결코 선택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신앙도 좋고 율법주의도 다 좋은데 복음신앙이 훨씬 더 좋다고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신앙이 좋긴 좋은데 할례나 경건한 율법, 고상한 사상을 더하면 더 좋다"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으로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어떤 +α를 덧붙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죄악입니다. 이때 복음은 그 생명력과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서구의 기독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교회가 갈수록 텅텅 비어 가고 있는 것도 그들이 갖가지 이론과 사상, 신학으로 복음을 상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엔터테인먼트, 메니지먼트, 심리학에 영향을 받아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복음의 진리와 절대성을 굳게 붙들고 조금도 그들과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들과 타협하여 할례를 묵인했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전락하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는 유대교의 율법과 형식 속에 사장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불교나 이슬람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이방 세계의 선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타문화권의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것은 다 양보한다 해도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일시라도 복종치 않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자 한 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양떼들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었습니다(2:4,5).

 

(예루살렘교회에 구원관을 문의함)

 

2b를 보십시오.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바울과 유대교 신자들은 다투다가 이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많은 불신이 심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불신을 심기는 쉬워도 한번 심겨진 불신을 뽑아내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할례파 유대인들도 물러서지 않고 여러 가지 이론과 말로 도전해왔습니다. 문제는 바울과 바나바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습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교회 전체적으로도 분명한 복음의 교리를 세워야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결국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바울과 바나바 및 그들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서 행위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 몇몇 형제의 의견인지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의 의견인지 묻고자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에 구원의 신학이 달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정리를 해주어야합니다.

 

(사마리아에서 선교보고를 하고)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루살렘 교회에 가는 일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만큼 복음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할례를 하지 않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구원의 조건에 할례가 필요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하나님이 하신 크신 일을 듣고 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교보고)

 

4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두 사도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기적을 보여주셨음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주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보고를 마치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행위의 구원을 주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5절을 보십시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회의 하는 장면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먼저 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그 외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데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에서 안디옥에 내려온 사람들의 의견을 지지하였습니다. 유대파 그리스도인도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마땅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죄악된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아들은 율법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24절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역할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게 살도록 기준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후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구원해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와 복음 신앙의 양립불가)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 후에도 이 율법을 붙들고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이는 우리의 신앙 성장을 가로막는 암초가 될 뿐입니다.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좋은 것으로 여겨왔던 율법에 대한 미련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와 예수님의 은헤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앞세우는 기독교는 결코 양립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유대교에서 할례와 안식일 율법을 제거하면 유대교는 뿌리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한편 기독교에 율법을 도입하게 되면 복음의 생명력은 상실되고 기독교는 형식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구원과 은혜 구원의 복음은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총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율법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6,7a절을 보십시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간에 많은 변론을 하며 자신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많은 변론은 much debate 토론입니다. 서로 간에 의견이 나누어져 싸운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아마 높은 사회적 지위나, 학문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매우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고, 모세도 할례를 행했으며, 특히 구주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사도님들, 장로님들도 다 할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주장할 때는 정말 이들의 말이 옳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겸손하였습니다. 서로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인 모임이었습니다.

 

(베드로를 택하신 하나님)

 

7b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그 후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일어났습니다. 형제들아 하며 자신과 평등하게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원수들아!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이루신 이방인 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가운데 고넬료에게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

 

8절을 보십시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베드로는 9장의 고넬료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할례를 하지 않고 성령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유대인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평등하게 주시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와 같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하지도 않았는데 성령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8). 이것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12년 전의 고넬료 사건을 상기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오래 전부터 자기를 택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고넬료 사건에 나타나 있는 객관적인 성령의 역사를 근거로 이방인들을 아무 조건없이 영접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차별하지 않음)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을 때 그들의 마음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하십니다. 깨끗한 그 마음에 거룩한 성령을 주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자에게도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사 구원하시는데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나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평등하게 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하지 않고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시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치 않으셨습니다. 구원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음을 믿기만 하면, 그들을 영접하시고 그 증거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여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이를 기초로 베드로는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반대함)

 

10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질문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교만하게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간섭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데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능히 메지 못한 율법의 멍에를 그들에게 메게 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서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할례를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하는 죄악입니다.

또 베드로는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조상과 자신들도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이 조상과 우리도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했습니다. 이 말대로 율법의 멍에는 누구도 다 지킬 수 없는 무겁고 힘든 멍에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엉청난 멍에를 메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멍에를 메지 않으면서 양들에게 멍에를 메도록 도왔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자는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됩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지지 못하던 그 멍에를 어떻게 다시 양들에게 지울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자신도 못한 것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까? 이는 모순된 행위요, 양들을 저주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 가운데 송아지같이 뛰놀던 양들 목에 무거운 멍에를 탁 씌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만 전해야지 한국의 문화를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율법의 멍에를 쓰면 자유와 기쁨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더 이상 신앙생활이 기쁘지 않고 부정적이 됩니다. 미국에 간 우리 선교사들이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기 쉽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선교사님이라고 쓰니까 외국에서 선교사님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곳에서는 님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부릅니다. 한국의 권위주의를 가지고 그곳에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구원을 얻는데는 다른 조건이 필요없음을 단호히 선언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유대인이나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결코 율법의 행위나 할례를 행한다고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뒤에 반드시 양을 많이 치고 선행을 쌓는다고 해서, 혹은 매주 7회씩 일용할 양식을 먹고 소감을 열심히 쓴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구원의 은혜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아니하시고 믿기만 하면 그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16절에서 감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가 나중에는 나의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절대 기초는 바로 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에 기초하여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로 사는 신앙생활)

 

주님의 이 은혜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은혜가 가져다 주는 생명력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말은 참 간단한데, 실생활에서 은혜로 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행위규범적인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으나, 신앙생활은 율법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확신하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이 은혜에 대해서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는 구원의 그 순간에 누리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를 열심히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 일용할 양식도 매일 감당하고 소감도 잘 감당하고, 또 양도 열심히 쳐야지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이런 것들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 여전히 죄에 시달리는 자신을 바라보며 불의한 생각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을 자학하고 절망하며 자신은 UBF 체질이 아닌 것 같다며 성경에 없는 체질론을 들먹이기도 합니다. 심하면 사단의 참소에 빠져 "그래도 네가 신자냐? 그래도 네가 목자냐?"하는 음성에 괴로워합니다. 때로 주님의 은혜로 잘 되는 일이 있으면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 우리가 참으로 은혜를 알고, 주님의 은혜로 사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았으면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은혜로 하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내가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건강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헤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호흡조차도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

 

12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베드로가 발언을 하자 온 무리는 가만히 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자신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방인 복음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에게 할례를 하거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을 주신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총회장 야고보의 결론)

 

13절을 보십시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바울이 말을 마치자 예루살렘 교회의 총회장이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서 현재 이 총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변화되어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 야고보서를 남겼습니다. 야고보는 할례주의자들이 자기들 편으로 여길 만큼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 엄격한 율법 준행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야고보서를 보면 그가 얼마나 행함을 강조한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주의자들은 야고보가 혹시 자기들 편을 들어주지나 않을까 기대하였을지 모릅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구원 역사)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시몬 베드로를 택한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베드로와 같은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의견을 정리하였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은혜 속에 이방인 구원역사)

 

15,16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야고보는 구약의 선지자 말씀을 통해서 현재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과도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돌아오셔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허물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지어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 9:11,12절을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실 때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는 고넬료 사건이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한 이방선교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해 놓으신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도록 뜻을 두셨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두지 않으심을 확증해 보였습니다. 이로써 베드로의 말대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이 모든 사실을 기초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은혜로 이방인을 구원하심)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하니님은 이스라엘의 장막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도 주님을 찾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어떤 율법적인 제약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

 

18절을 보십시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이 모든 일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방인들이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이방인을 율법으로 괴롭히지 말자고 함)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야고보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루신 역사를 증거하였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율법으로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야고보는 이방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은혜로 율법을 세우라고 함)

 

20절을 보십시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최소한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십니다. 야고보는 다만 최소의 율법을 그들에게 지키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율법을 가르칩니다. 본질적인 것은 양보할 수 있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은혜로 구원 받았지만 은혜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자고 합니다.

우상에게 제사지낸 더러운 것을 먹지 말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음행을 피하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목메어 죽인 것을 먹지 말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목메어 죽인 것은 피가 고기 속에 남아 있어서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피를 먹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들로 복음 진리에 위배되거나,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이런 것을 금지해 주도록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정적인 율법의 필요)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우상의 더러운 것과 피를 멀리하가고 금하는 이유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각성에서 모세의 율법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것을 금하도록 하는 그 글을 읽었습니다. 전통에 근거하여 최소한의 율법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지키는 것입니다. 당시에 곳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교제에 거리낌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런 규례는 당시 율법적인 유대인 출신 신자들로 인해 잠정적으로 필요한 규칙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까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야고보의 결론은 사도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또 이방인들을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도록 해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이방인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 헌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다 자유요 우상숭배를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위해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결과로서 십계명을 지켜야합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항구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산다고 십계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은혜로 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보다 십계명을 더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이야기 한 율법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덕을 위하여 삼가야 할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최소한의 삼가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은 감당해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술이나 담배 문제나 마약, 노름, 음란비디오 같은 것들은 삼가야 할 것들입니다. 반면에 일용할 양식이나, 1:1 말씀 가르치기, 소감쓰기 등은 UBF의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 의미와 중요성을 영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하거나 권하는 것이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복음 진리에 서서 볼 때 최소한 이런 것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을 위해서 이 시대에서 삼가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냄]

 

22절을 보십시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들은 야고보의 의견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교회가 예루살렘 교회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보내서 그들의 의견을 확실히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 중에서 바사바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를 택하여 보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라는 나중에 바울과 동역자가 되어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23절을 보십시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그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이렇습니다.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가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고 편지를 보냅니다. 23절을 보면 편지의 수신인이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의 훼방이 안디옥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이방인 교회로 확산되어 갔음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여 수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으로 괴롭히는 자들을 책망함)

 

24절을 보십시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우선 전에 예루살렘에서 가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사도들이 보낸 사람이 아닌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은 안디옥 교회에 가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말로 성도들을 괴롭히고 마음을 혼란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사사로이 가서 여러 가지 사악한 말로 양떼들을 괴롭게 했으며 마음을 혹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다에서 내려와 형제들을 미혹하던 자들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만장일치로 은혜 신앙을 결정함)

 

25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헌신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최고의 칭찬을 함으로써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깊이 신뢰하는 훌륭한 목자임을 보증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은혜의 복음을 결의하였습니다. 만장일치라는 말을 쓴 것을 볼 때 그들은 서로 의견이 나누어졌지만 나중에는 하나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겸손하였습니다. 이 편지가 위조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였습니다.

 

(성령과 교회가 이신칭의를 결정함)

 

26. (상동)

2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보내어 그들의 말을 통해서도 편지의 내용을 말로 전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요긴 한 것들 외에는 아무런 율법적인 짐도 그들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할례를 하지 않아도 구원 받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은 이 결정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이라고 하여 성령을 앞세웠습니다. 이는 총회의 결정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예루살렘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고 확증했습니다. 이로써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헛된 주장이었음이 만천하에 공포하였습니다.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율법주의와 복음신앙 사이의 싸움에서 은혜의 복음의 진리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놓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세계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가 확고히 서게 되었습니다. 민족, 문화, 전통, 관습, 할례, 무할례 등 모든 문화의 장벽을 초월해서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또 선교지에서 일어난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가 해결해 주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줌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와의 사이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요긴한 율법)

 

29절을 보십시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꼭 요긴한 것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고 음행하는 우상 숭배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최소의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적어도 십계명은 은혜로 지켜야합니다.

사도행전 15장 강해 일부 은혜의 복음을 굳게 하고

말씀 사도행전 151-사도행전 1529

요절 사도행전 1511절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사도행전 15장 강해 이부 바울과 바나바의 이차 전도여행

말씀 사도행전 1530-사도행전 1541

요절 사도행전 1536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여 은혜의 복음을 굳게 하였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여 굳게하고 은혜의 복음을 일차 전도여행한 곳에 전하고자 이차 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사 유럽전도로 그들을 인도하여주십니다.

 

(안디옥에 전해진 은혜의 복음)

 

30,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바울과 바나바는 유다와 실라를 데리고 예루살렘 교회와 작별하였습니다. 그들이 본 교회가 있는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사도들의 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함께 말하여 사도의 편지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본 교회의 편지를 읽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 동안 율법주의자들로 인한 무거운 멍에와 짐을 벗고 다시 주님의 은혜로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이 그들은 흔들리던 신앙을 바로 잡고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더욱 더 세계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간 유다와 실라)

 

32,33절을 보십시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입니다 함께 내려온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였으므로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굳게 서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았습니다. 유다는 자기를 보냈던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계속 머물며 다수한 다른 리더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예수님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안디옥 사역)

 

34. 35절을 보십시오. (없음) 어떤 사본에는 실라가 그들과 함께 유하기로 작정하고 있음 35절을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다가 안디옥에 머물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잠시 유하였습니다. 두 사도는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많은 성경 선생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때 유명한 자유의 복음이라고 하는 갈라디아서를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분명한 선을 긋고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 은혜 속에서 율법을 바라봅니다. 은혜의 복음을 가장 선명하게 기록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복음 진리를 수호한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또 성령께서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복음 진리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총회를 계기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그늘을 벗어나 세계화되고 이방선교를 위한 교리적인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복음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거짓 진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진리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양떼들이 메고 있는 율법과 죄의 멍에를 벗겨 주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세계 선교 사명을 줄기차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차전도 여행의 시작)

 

36절을 보십시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으로 유럽이 어떻게 개척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큰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신 크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환상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며칠 후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를 돌아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어떤가 보고 은혜의 복음을 전하여 은혜에 견고히 세우고자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단 며칠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고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성령의 방향과 계획과 준비 속에 하였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성령의 지시를 받지 않고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제자를 굳게 하고자 하는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가운데 큰 뜻을 두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유럽선교의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시작은 이렇게 작은 일을 하면서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이렇게 한번 도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하는 바나바)

 

37절을 보십시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이차 전도 여행을 앞두고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도 데리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품고 세우는 사람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마가가 짐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왜 마가를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요?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입니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첫 번째는 실패를 했지만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도전하도록 해서 이번에는 승리하도록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바나바는 전도 뿐 아니라 마가를 세우는 것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제자 양성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

 

3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바울은 일차전도 여행 때 밤빌리아서 자기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원칙을 중시하였습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을 따라 나섰다가 밤빌리아에서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그가 또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도여행은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다른 사람도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힘들다고 가버리면 남은 사람은 맥이 빠집니다. 마가로 인해 한동안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마가는 안디옥으로 돌아와 회복되었고, 또 전도여행을 따라 가려고 합니다. 선교 측면에서 마가의 동행은 득보다는 실이 많았습니다. 선교도 힘든데 마가를 감당해야 하고, 그러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선교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갈라짐)

 

39절을 보십시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두 사도는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졌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이 충만하고 바울은 사명이 충실하였습니다. 바나바는 한 사람의 동역자를 얻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선교하다가 돌에 맞으면서 마가는 전도여행을 하면서 받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견에는 삶의 철학과 소신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크게 다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선교팀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들은 심히 다툼으로 서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툰 후에 헤어져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 섬으로 갔습니다. 그 후에 마가는 바나바를 통하여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요 마가복음의 저자로 성장하였습니다. 마가도 이 사건을 통하여 경성하고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영적아들이 되어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마가복음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서 중에 최초로 마가복음을 저술하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가를 키운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싸움에 대한 고찰)

 

바나바와 바울 중에 누가 맞고, 틀리고는 없습니다. 바울은 선교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여러 교회를 세웠고, 후에 아덴, 고린도, 로마에 까지 이릅니다. 원칙에서는 바울이 분명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갑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 구브로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나바가 선교한 지역은 넓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바나바의 위로로 실패를 극복한 마가는 후에 바울이 로마 선교를 할 때 동역자가 되었습니다(4:10). 또 바울이 마지막 때에 꼭 필요해서 부른 사람이 되었습니다(딤후4:11). 바울은 마음으로 바나바와 화해했고 마가를 영접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달라서 일시적으로 다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 싸워도 다시 합해집니다. 결국 싸움도 주님에게 유익합니다.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하여 마가를 바울의 좋은 선교 동역자요 복음서의 첫 저자로 키우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신대로 하여 적극적으로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성과 은사대로 쓰십니다. 사람은 일로 다투고 갈라서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분명하면 잠시 갈라져도 다시 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일하는 방법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잠시 싸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중에는 합해져야합니다. 아멘!

 

(바울과 실라의 전도 여행)

 

40,4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 남은 실라를 택하였습니다. 바울이 실라를 택함으로 바울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강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싸웠지만 하나님은 두 팀에 다 함께 하였습니다. 어느 하나만이 옳지 않고 다 옳을 때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주의 은혜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예루살렘 교회에 준 은혜의 복음을 전하여 굳게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5장 강해 이부 바울과 바나바의 이차 전도여행

말씀 사도행전 1530-사도행전 1541

요절 사도행전 1536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사도행전 15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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