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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후서 10장 강해 주안에서 자랑하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1-04-29 00:00:00
조회수 : 3,89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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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장 강해 주안에서 자랑하라

말씀 고린도후서 101-고린도후서 1018

요절 고린도후서 10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어떤 자들은 바울을 인간적으로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비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바울이 전한 복음조차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거짓사도요, 궤휼의 역군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가장했습니다. (11:13)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11:4)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로 인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를 자랑합니다. 이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양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고, 사도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의 권위를 회복할 때 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양들의 생명을 살리고 양들을 세울 수 있습니다. (10:8) 이는 마치 의사나 판사가 권위가 있어야 수술하거나 재판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전문의에게 Intern의사는 절대적으로 복종합니다. 종합병원같은 드라마를 보면 전문의가 Intern의사의 쪼인트까지 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판사의 권위도 절대적입니다. 재판할 때 판사가 들어오면 모두 일어서서 맞이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는 겸손해야 하지만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양들을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영적권위가 있을 때 목자의 말에 순종하여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김 목자님의 선교후보 입소소감을 보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처음 job을 잡을 때 저는 노가대를 하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사실 대학원까지 졸업한 자매님, 3형제의 딸 중에 맏딸로 자란 공주같은 자매님에게 노가대 방향을 주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서 얼마든지 반발하고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하여 노가대를 하는 데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공전, 호서대의 시간강사 자리를 주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컴퓨터 학원에서 풍족한 물질을 주셨습니다. 단대 전산과 졸업생들은 여러 번 시험 봐도 떨어진 1급 기사 자격증을 단 한 번에 따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는 김 목자님이 목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경외심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의 권위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온유하게 대하기를 원하는 바울)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담대함과 온유와 관용하는 마음입니다.

지금 고린도 성도들도 바울을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로 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떠났을 때는 편지로 담대히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자를 담대히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만날 때는 담대히 대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편지를 보고 회개하면 만날 때 유순하게 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권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여 그들을 유순한 태도로 대하기를 원합니다.

온유는 인격의 수준이라고 합니다. 돈이나 지식으로 인격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지위나 소유와 인격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수가 강의한 후에 학생이 골탕을 먹이려고 세 번이나 질문하였습니다. 교수는 학생을 일어나라고 한 후에 그를 퇴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온유는 철학에서 분노를 다스리는 인격이라고 합니다. 감성지수도 온유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편견 없이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슬퍼서 다른 사람의 감성을 느끼지 못하면 안 됩니다. 나의 감정이 어떻든 다른 사람의 감성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쁨 슬픔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타인에 의해서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것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온유한 자가 정치적인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마지막에 나는 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온유로 세상을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관용은 옳은 것 위에 더 옳은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지금 말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의를 위하여 관용하는 것입니다. 더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믿어줍니다. 기다려줍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쁨이 있을 때 관용할 수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를 영접한 아버지는 관용입니다. 그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사랑으로 잔치를 베풉니다. 자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감싸주는 것입니다.

빈약하고 모르는 것이 많을 때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대한다고 합니다.

온유와 관용의 표본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박는 자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에서 말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온유와 관용을 본받아서 그들을 권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을 계속하여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가서 그들을 담대하게 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바울)

 

3-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바울은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의 죄에 대해서 육신적인 싸움을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분노를 하였지만 인간적인 분노로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십자가의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성령과 진리와 사랑으로 싸웠습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자신을 체포하러왔을 때 그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칼로 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지만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버리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십자가의 잔을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이론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 아는 것에 대해서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립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바울도 참고 온유함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그들도 그리스도에게 복종을 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까지 온유하고 참음으로만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다시 오실 때는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들 가운데 회개하고 복종하는 자들이 온전히 복종하게 되면 나머지 회개치 않고 복종치 않는 자를 벌하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서 벌을 주기 전에 회개해야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외모만 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외모는 초라했습니다. 바울전에 보면 바울은 키가 작고, 대머리에다가, 다리가 굽었으며, 눈썹이 서로 붙었고, 코는 메부리코였으며, 눈은 안질에 걸려 눈꼽이 늘 끼어있었고 간질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런 목자를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비실비실 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외모만 보고 그 내면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한 순간을 보고 그 사람 인생전체를 평가합니다. 학력이나 재산이나 지위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를 보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군대 귀신들린 자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대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박사가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합니다. 어떤 교수가 아인슈타인을 찾아와서 아인슈타인을 정원사로 생각하였습니다.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만나러왔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왜요? 그렇게 묻자 네가 알아서 무엇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내가 박사덴 네가 왜 꼬치꼬치 묻느냐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내가 아인슈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용준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마중하기로 하였습니다. 집사님이 마중 나왔다가 초라한 외모를 보고 당신이요? 하고 무시하며 따라오라고 하며 앞서 갔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 십리 길을 짐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흥회를 인도한 후에 그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눈물로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나이 어린 목사를 무시합니다. 아기 목사라고 합니다. 말씀을 전하자 유망하다고 말합니다. 목사를 누구를 닮았느니, 사투리가 어떠니 하면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요한웨슬리는 158센티고 55킬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넓고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목자를 인간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믿는다면 바울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해야합니다. 사도로 대해야 합니다.

자신이 작은 것은 아담하고 다른 사람은 왜소하다고 합니다. 자신과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바울을 인간적으로 보고 대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믿음으로 보고 대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권세)

 

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권세를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로 대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권세를 자랑하듯이 고린도성도들도 바울의 권세를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세를 인정해야 그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이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자 그들 가운데 많은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바울은 받은 권세는 성도들을 무너뜨리라고 주신 권세가 아닙니다. 죄 지은 자를 책망하고 쫓아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큰소리 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권세이므로 주님만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만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큰소리를 치면 높여주는데 섬기려하면 무시합니다. 겸손해서 무시하면 겸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강하지만 약하게 살면 사람들은 아주 밟아버립니다.

바울은 무시하여도 오직 성도들을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권세는 그들을 회개시키고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세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에게 주신 권세를 아무리 자랑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영적인 권세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세를 자랑해야합니다.

 

(온유함으로 대하기를 원하는 바울)

 

9-11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편지로만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하여 놀라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없을 때만 큰 소리 치는 나약한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여 화내는 모습으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입니다.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죄를 지은 자는 책망하나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진정 원하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여 회개한 모습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는 언제까지만 온유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시 만날 때 회개치 않는 자들을 엄하게 책망할 것입니다.

 

(비교하는 자의 어리석음)

 

12절을 보싮시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 축에 끼여들거나 그들과 견주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만든 척도로 자기를 재고 자기가 세운 표준에다 자기를 견주어보고 있으니 그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칭찬하는 자들과 같이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적자는 자기 기준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 기준으로 바울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이 위대하다고 자랑하였습니다. 이런 자기 자랑은 자멸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비교하면 상대적인 가치를 갖습니다. 그들은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나대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그대로 자랑해야합니다. 키가 작으면 아담하게 살아야합니다. 울어도 힘써도 키는 못 키웁니다.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나는 음악을 하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히 기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때 퇴학을 당합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남과 같으려 하면 못 따라간다 남과 다른 것을 하려면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너는 너가 되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후에 열한 명의 물리학자를 두고 설명해도 두 명뿐이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말고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자신을 자랑하다 보면 남을 낮춥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못된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 부부 싸움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 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다가 사울처럼 악령에 씌입니다.

 

(한계를 따라서 자랑함)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 신자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랑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적케 합니다. 우리 신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물질적 지원도 받지 않고 자립하여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tent 만드는 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양들에게 말하였습니다.(10:10)

그러자 대적들이 자신을 자랑하고 바울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이 불신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부득불 자신을 자랑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사도 바울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덧입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무엇을 자랑합니까?

간증을 하다가 보면 점점 자랑이 커집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과장하여 하기 쉽습니다.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오직 나에게 주신 은혜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하는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남이 천재라고 해서 내가 천재라고 하면 바보입니다.

어느날 테레사 수녀에게 모여서 손을 잡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오며 만졌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나는 성녀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를 만지고 싶으면 가난한 사람을 만지라고 합니다.

미국 선교사가 양자강에 홍수로 떠 내려 갔습니다. 청년이 구해주었습니다. 선교사는 청년에게 이름을 물어 보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자랑하면 허영 위선이 됩니다. 지나치게 자랑하다고 덜 알아주면 섭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간증할 때 진실해야합니다.

바울은 남이 수고한 것을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축위원장에게 감사패를 줍니다. 성도들이 다 받아야 하는데 왜 내가 받느냐고 합니다. 남의 수고로 자기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은 한 것이 없으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영광을 가로채고 자랑을 하면 도둑질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눠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서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루신 일만 진실하게 자랑합니다.

곧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자랑합니다. 분량을 따라서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나의 가족, 나의 사람을 주십니다. 나에게 나눠주신 개성이 있습니다. 나는 나답게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나에게 주신 기회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내가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사실대로 자랑해야 합니다.

 

(양들의 자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람)

 

14-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자신을 과신하여 나아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한 것을 자랑합니다.

성도는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해야 전도가 됩니다. 자랑하는 목적은 전도에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나쁜 이야기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전하기 위한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자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이 자랄수록 바울의 선교영역이 더욱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커짐에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자랑이 더욱 커지기를 원하였습니다. 양들의 믿음이 커지면 목자에 대한 자랑도 커집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양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자랑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한 범위를 넘어서서 양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교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랑)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은 남이 이루어놓은 일로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할뿐 아니라 그곳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바울에 대한 자랑이 넓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분수(분량)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오는데 쉽게 영역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선교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선교사명을 주시면서 두 가지 영역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9:15)

둘째는 개척자로서 다른 사람이 개척해 놓은 터 위에다 교회를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15:20)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분량대로 끊임없이 미개척지로 나아가 이방인을 믿어 순종케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 분량에 따라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겨주신 선교구역이었으며,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로서 그들에게 사도로 당당히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안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단대, 상대, 호대, 순대, 백석대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곳을 개척하면 이곳은 우리의 자랑입니다.

한사라 선교사님은 상대를 개척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는 한사라 선교사의 자랑입니다. 이제 한제임스 선교사님이 오스트리아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한제임스 선교사님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단대도 미개척된 단과대 혹은 과가 많습니다. 그곳을 개척하여 우리의 자랑이 되길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

 

17-18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사람들은 칭찬을 들을 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비난 받을 때에 디프레스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타인 주도권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않은 자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랑이 커져야합니다. 남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나는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만이 가진 비밀한 행복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거꾸로 바뀌어도 주안에서의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자랑이 없으면 은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현대는 반겸손의 시대라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젊은 시대일수록 겸손하지 않습니다. 현대는 피알의 시대요. 개성의 시대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거짓을 따라서 삽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 자랑에 빠집니다. 그 자랑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바른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해야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자신을 칭찬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9:23,24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아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자랑합니다. 학벌을 자랑하고, 건강을 자랑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자랑할 것이 없으면 남편자랑, 아내자랑, 자식자랑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하려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하신 일을 자랑해야합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자랑을 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는 일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주안에서 서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자랑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들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안에서 자랑과 긍지로 충만해야합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바라보며 서로를 자랑해야합니다. 비록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자녀는 부모를 양들은 목자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합니다. 또한 부부는 서로 간에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가장 큰 행복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다음은 당신을 만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을 자랑함)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을 결론적으로 주님이 높임 받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혈통과 선민의 우월감을 자랑했습니다. 오늘날도 미국은 힘과 풍요를 자랑합니다.

영국사람들은 신사도를 자랑합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예술을 자랑합니다. 호주 뉴질랜드 사람은 자연환경을 자랑합니다. 한국사람은 족보를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 조건을 내세우면 대가브리엘 문하생으로서 자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자랑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중에도 그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떤 점에서 십자가가 바울의 자랑이 되었을까요? 십자가는 죄사함을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십자가입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화가 열렸습니다. 모든 교회가 사도 신경을 외우고 같은 성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직후 관을 놓고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서양에는 장례식이 끝나고 관뚜껑을 열어놓고 죽은 사람과 마지막 인사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때 "그동안 고마웠어요. 천국가세요" 하는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장례식 후에 인사를 하는데 관을 열었지만 관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관에는 거울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자기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세계교회가 하나가 뇌기 위해서는 교파, 교리, 자기 영광, 이기심을 죽여야 함으로 이 의식을 치룬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사람을 죽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갈릴리에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나의 자존심, 욕심, 명예 이 모든 것이 죽은 것입니다. 이제 주님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자랑하지 말고 주님만을 자랑해야합니다.

빅토리위고는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방탕했습니다. 명성은 있었지만 가정은 엉망이었습니다. 특히 주벽이 심하여 술만 취하면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1841년 어느날 자신의 딸이 강물에 빠져 자살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이라" 이후부터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서전적 소설 장발장을 썼습니다. 장발장은 새사람이 되었으나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형사도 끝까지 쫓아오며 괴롭힙니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 때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이라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때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알아주든 말든 스스로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그때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양들의 죄와 온유함으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자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범위를 따라서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양들이 목자를 자랑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야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10장 강해 주안에서 자랑하라

말씀 고린도후서 101-고린도후서 1018

요절: 고린도후서 1017,18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린도후서 10장 강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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